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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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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에 묻는다

지난달 광복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뒤이어 일본 천황의 사과를 요구하는 강경한 발언을 한 배경에, 작년 12월의 양국 수뇌회담에서 일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총리가 종군위안부 문제로 이 대통령에게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고 일본 언론이 전했습니다.

교토(京都)에서 있었던 회담 모두발언에서 이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자 노다 총리는 “그것은 이미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일본의 상투적 답변을 하며 화제를 경협문제로 돌렸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태인 대학살 문제를 신생 독일공화국이 깨끗이 시인하고 사과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종군위안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성의 없는 사과로 일관해 오다가, 이제는 노다 총리가 강제성을 확인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중앙정계 진출을 노리는 하시모토 토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우리에게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하더라도 일본의 최고 정치 책임자인 국무총리가 과거 정부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해석과 사과에 이의를 걸고 나선 것은 사태의 일본 지도층 및 지식인 일부의 이 문제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항복을 결정하며 당시의 일본정부 각 부처와 일선 군부대는 국제법에 걸릴 전쟁범죄의 증거가 될 물건은 전부 폐기하도록 했는데, 이제 와서 위안부 강제 징발의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하라고 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만저만이 아닌 망발입니다.

이에 앞서 이미 1996년에 일본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櫻井良子) 여사가 위안부의 “강제연행은 없었고, 다만 비즈니스(상행위)만이 있었다”는 발언을 공개석상에서 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말썽 많은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와 더불어 위안부 문제의 일본 보수파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이 '위안부 비즈니스론'의 배경에는 오랜 전통을 가진 일본의 수치스러운 공창(公娼) 문화가 있습니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이미 16세기 말에 당시의 수도인 교토에 공창이 있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집권하여 당시 에도(江戶)라 불린 현재의 도쿄로 도읍을 옮긴 후 1617년에 특정 지대를 지정하여 공창을 허가했습니다. 이것이 대동아전쟁 패전 직후까지 계속된 악명 높은 요시하라 유곽(吉原遊廓)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앞잡이 악덕상인과 소위 대륙낭인(大陸浪人)이 선비의 나라 조선에 상륙하면서 ‘쿠루와(廓)’라 불린 이 추잡한 공창 산업도 같이 들어와, 1902년 처음으로 부산에서 영업을 시작하고, 뒤이어 군산 서울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1930년대 후반 필자가 중학교에 다닐 때 인구 5만의 소도시 진주(晉州)에도 청루(靑樓)라 불리는 공창이 있었고, 인구 2만이 될까 말까 한 가까운 어항 삼천포에도 작은 청루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초반에 별로 넓지도 않은 일본 국토 544개 도시에 공창이 있었다고 하니, 이 타기(唾棄)할 인신매매 산업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무렵, 조선에는 25개 도시에 공창이 있었고 포주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이었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일본은 ‘가라유키(唐行) 상’이라 불리는 다수의 창녀를 동남아 각지에 보내 돈을 벌게 했습니다. 대부분이 나가사키(長崎)현의 시마바라(島原)와 구마모토(熊本)현의 아마쿠사(天草) 지방의 농어촌 출신 부녀자였던 이들의 존재는 1974년에 이들을 주제로 한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다시 일본사회의 관심사로 등장했습니다. 국가적으로 창피하다고 그때까지는 쉬쉬했던 역사의 일부였습니다. 가라(唐)는 당시 일본에서 외국을 총칭하는 말로, 이때의 일본 창녀파견 산업도 동남아 식민지에 주둔하는 외국 군인과 무역상인들의 수요에 힘입어 사업은 번창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종군위안부는 상행위였다”고 강변하는 일본 측 주장의 배경에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 같은 여성으로 상행위 이론으로 위안부 문제를 호도하려는 사쿠라이 여사의 글을 읽을 때마다 필자는 그녀의 양심을 의심합니다.

그들 주장의 한 증거로 1944년 후반기에 서울에서 발행되던 일제 어용지 ‘매일신보’와 ‘게이조닛포(경성일보)’에 실린 위안부 모집 광고를 들지만, 이들 악덕 포주가 전면에 나서 종군위안부 사업이 시작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월수입 300엔이란 감언이설로도 필요한 인원을 채울 수 없으니 ‘여자정신대(挺身隊)’라는 법으로 징발한 여성 일부를 위안부로 돌린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신대’라는 이름이 위안부에 붙여진 것이 이 때문입니다. 당시 진주에서의 한 달 학생 하숙비가 15엔이었습니다.

일본은 지금 우리나라만이 종군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괴롭히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이 문제의 국제 여론을 과소평가하려는 또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물론 종군위안부 피해자의 태반이 일본인, 조선인 및 중국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만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등 동남아 여러 나라 주민도 피해를 입었으며, 전쟁으로 수용된 ‘적성 외국인’ 여성 일부도 희생자였습니다.

미국 하원 소위원회의 증언대에 선 네덜란드 여성 얀 루프 오헤른(Jan Ruff-O'Herme) 은1944년 2월부터 4개월 동안 동료 10명과 함께 인도네시아 자바(Java)의 외국인수용소에서 끌려나와 일본군 위안소에서 성노예로 강제 봉사했다고 말했습니다.

네덜란드 하원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 국회가 결의문을 채택하여 일본의 위안부 문제 사과를 요구하였으며, UN 인권위원회와 유럽연합(EU)도 같은 취지의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습니다. 일본 천황이 과거 잘못을 우리나라에 사과할 용의가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일본이 좀 더 어른스러운 태도로 이 문제의 해결에 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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