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백 냥짜리 휘호
045 백 냥짜리 휘호
일본의 문인화의 시조로서 유명한 이케노 다이가는 서예의 대가이기도 했다.
1723년 교토에서 태어나 히가시야마의 마쿠즈하하라에 초당을 짓고 살았는데 그에게 서화를 부탁하는 자들이 초당 앞에 넘쳐 났다.
어느 날 후시미 지방의 이나리 다이묘진을 정일 품에 봉하는 조서가 내렸기 때문에 신불을 참배하는 사람들이 상의하여 절 앞에 길이 수십 미터나 되는 노보리를 세우기로 하고 그 휘호를 다이가에게 부탁했다.
노보리를 앞에 놓고 잠시 묵묵히 생각하던 다이가는 사람들이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큰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서 뚜렷하게 첫 자를 썼다 그리고는 계속 이어 쓰는가 했더니 문득 붓을 놓고 말했다.
"그런데 이 휘호료는 얼마나 주실 겁니까?"
"얼마든지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다이가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그러면 즉석에서 백 냥을 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한 자를 써서 노보리를 더럽힌 뒤라 어쩔 수 없이 그러마고 대답했다.
다이가는 승낙을 받아 낸 후에 다시 붓을 들어 단숨에 나머지를 썼다.
그리고 사례금 백 냥을 받아들자 부랴부랴 어디론가 가 버렸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여 그에게 이러쿵저러쿵 욕을 퍼부었다.
"다이가라는 사람은 돈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고결한 인물이라고 들었는데 이제보니 도대체가 돼먹지 않았군. 한 글자 쓰고 사례금을 요구하다니 비겁한 처사가 아닌가."
"저렇게 더러운 자가 쓴 노보리를 신전에 세운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야. 차라리 찢어 버리는 게 낫겠어."
이렇게 떠들고 있는데, 잠시 후에 당사자인 다이가가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돌아오더니 품에서 조금 전에 받았던 백 냥을 꺼내놓고 말했다.
"실은 이삼 일 전에 시피조의 골동품상에서 훌륭한 차 가마를 발견했는데 값이 백 냥이나 되어서 나 같은 가난뱅이 화가는 엄두고 낼 수 없었다오.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지만 도리가 있었겠고? 그때 마침 휘호를써 달라는 얘기가 나와서 꽤 비싸다는 것 알면서도 백 냥을 요구했던 거요. 그런데 서둘러 골동품상에 가보니 한 발 차이로 팔려 버린 후였소,
그래서 이 돈은 필요 없게 되었으니 돌려 드리겠소."
이유를 들은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경솔하게 다이가를 욕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모처럼 드린 것이니 넣어 두십시오."
그들은 사양하는 다이가에게 그 돈을 억지로 주었다.
이 이야기가 곧 세상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노보리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그런데 다이가는 일부러 시골뜨기 같은 모습으로 군중 속에 섞여서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노보리에 대해 평하는 것을 몰래 들었다. 구경꾼들 중에는 안목이 높은 사람도 있어서 비평이 자못 날카로웠다.
"과연 훌륭한 글씨이지만 아무래도 저 글씨는 약간 힘이 빠져 있는걸."
다이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똑같은 크기의 노보리를 주문하여 고쳐 썼다. 그리고는 주문한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노보리와 바꾸게 했다. 이렇게 휘호를 바꿔 쓰기를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는 바람에 마지막에는 받았던 백 냥이 모두 사라지고 심지어 자기 돈까지 털어 넣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 이야기도 금방 세상에 퍼져서 다이가의 순수함과 일에 대한 열정에 감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큰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새로 만든 노보리에 뚜렷하게 한 글자 쓰더니 붓을 놓고 느닷없이 사례금 이야기를 꺼냈으니 부탁한 사람들이 다이가는 돈에 눈이 먼 비열한 인간이라고 욕을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인물 평가는 잘못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물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행위하나, 행동 하나만을 보고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어떠어떠한 인물이라고 섣불리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역시 긴 안목을 관찰하여 그런 행위와 행동을 왜 했는가를 확인한 후에 평가하지 않으면 당치도 않은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인물이 비열한 행위를 한다고 여겨지더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으면 이 일화처럼 욕을 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경우가 많다.
즉석에서 솟구치는 감정을 억제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한 인물의 가치는 그 사람의 사회적 신뢰도와도 관계가 깊기 때문에 특히 상급자가 하급자를 볼 때는 상대의 주장을 충분히 듣고 긴 안목으로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위의 일화에서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이다.
두 번째로 배워야 할 것은 금전에 집착하지 않는 다이가의 자세다. 사례금 백 냥을 다라고 해서 오해를 샀지만, 그것은 돈에 욕심을 부린 것이 아니라 차 가마를 갖고 싶다는 어린애 같은 소망 때문이었다. 한 발 늦어서 가마가 팔렸으니 맥 냥이라는 큰돈이 필요 없어졌다고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돌아온 그에게는 우리가 따르기 힘든 순수함이 있다.
순수함이란 사물에 대해 조금도 집착하지 않고 깨끗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거의 예외 없이 금전에 지나칠 만큼 집착한다. 하물며 백 냥이라는 큰돈에 이르면 더욱 큰 집착이 생겨, 설사 그 돈이 필요 없어졌다고 해도 깨끗이 돌려주기는 힘들다. 약간 많이 받기는 했지만 당연히 받을 사례금을 받은 것뿐이라고 태도를 바꿀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돌려주러 갔다고 하니 우리가 도저히 넘보기 힘든 순수함이 우러러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금전에 집착하는 마음을 그렇게 깔끔하게 버릴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밝아지겠는가. 그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 냥을 끝까지 돌려주지 못하고 소유하게 된 다이가는 그 후 자신이 쓴 휘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평가를 듣고 두 번 세 번 고쳐 쓴다. 자기가 한일을 완벽하게 끝맺으려는 일에 대한 열정도 높이 살 만하지만 그로 인해서 새로 구입해야 할 노보리의 비용이 백 냥을 넘어서 오히려 자기 돈까지 털어 넣어야 했다는 일화가 너무나 참신하게 들린다. 손해인가 이득인가를 따져 보지 않는 너무나 바보스러운 계산 방법이지만, 그것을 바보스럽다라고 밖에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에 다이가의 행동은 매서운 채찍질이 되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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