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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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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민국당을 했나?

작성자 : 장기표 (welldom2@hanmir.com) http://welldom.or.kr




<뒤늦은 감이 있지만 나의 민국당 참여를 해명해 둘 필요가 있다고 보아 오래전에 써 두었던 이 글을 몇자 수정해서 올립니다>


나는 왜 민국당을 했나?

2000년 2월, 4.13 총선을 앞두고 내가 민국당 창당에 참여한 것과 관련하여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민국당에 참여할 당시보다 4.13총선이 끝난 이후 더 많은 비난을 들었다. 비난의 이유는 김윤환씨와 같은 구시대 정치인들과 어떻게 같은 정당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이런 비난이 적절하지 못할 수 있으나 나는 이런 비난을 감수할 뿐 해명하거나 불쾌한 반응을 보인 일이 별로 없다. 다만 나를 지지하는 분들께 간단히 해명한 일이 있고, '다리'지에 민국당 참여의 변을 하나 쓴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나의 민국당 참여에 대해 너무 지나친 비난을 할 때마다 나는 나의 '진의'를 밝혀 해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정치란 상식에 기초해서 해야 하거늘 대중이 나의 민국당 참여에 대해 실망하고 비난하면 그것을 수용해야지 일일이 해명하거나 반박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 해명을 자제해 왔다. 더욱이 민국당에 참여했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는 것은 나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있기 때문일진대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쯤 해명을 한번 하고싶다. 엊그제 어떤 후배가 찾아와 자기는 내가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 함께 민국당을 하는 것을 보고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자기가 학교에 다닐 때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는 기분이었을 것 같았다.

< 민국당 참여의 과정 >
나는 10여년 이상 진보적인 정당을 만들고자 노력해왔다. 1999년 말에는 홍사덕의원과 함께 '무지개연합'이란 정당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다. 그후 나는 젊은 동지들과 함께 '새시대개혁당'을 창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평소 교분이 있던 이수성 전 총리를 만나 당대표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더니 전면에 나설 수는 없겠고 내가 하는 일을 도와줄 수는 있다고 해서 상임고문을 맡기로 했다. 그 후 신상우씨와 김상현씨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수성, 신상우, 김상현, 나 넷이서 창당선언을 하기로 했다. (나는 당시 새시대개혁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해서 창당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이 분들과 함께 한다면 당명을 燭?정하더라도 함께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상현씨가 신당창당에 동의하면서도 몇일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몇 차례 기대했으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 같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2월 중순이라 선거가 불과 두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라 하루가 급했다. 그래서 우선 이수성, 신상우, 나 셋이서 창당을 선언하기로 해서 2월 16일경 조찬 회동을 계기로 창당할 뜻을 밝혔다. 신문과 방송에서 머릿기사로 취급될 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쯤 한나라당에서 '공천파동'이 일어났다. 즉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씨 등이 공천에서 탈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가 자신의 당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이회창씨가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순씨와 김광일씨가 이회창씨의 독주에 반기를 들어 공천을 반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이 분들은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신당을 창당할 의사를 밝혔다.
우리쪽(이수성, 신상우, 장기표 등)과 한나라당 탈당파쪽(김윤환, 이기택, 조순 등)이 각기 정당을 창당해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맞서기가 어려워 함께 정당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조순 선생이 한나라당 공천을 반납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조순 선생을 찾아갔다. 조순 선생은 이미 한나라당 탈당인사들과 함께 정당을 만들 의사를 갖고 있었다. 신당창당에 조순 선생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 나는 조순 선생께 우리 쪽(이수성, 장기표 등)도 함께 할 뜻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김윤환, 이기택, 조순, 신상우, 이수성, 장기표 등이 신당창당을 함께 하기로 하였고, 뒤이어 박찬종, 김광일, 한승수, 김상현씨 등이 동참하였다. 그리고 현역의원이거나 장관을 지낸 윤원중, 서훈, 노기태, 박정훈, 문정수, 최광씨 등도 참여했다. 곧이어 따로 신당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김용환씨와 허화평씨에게도 함께 할 것을 제의한 바, 김용환씨는 마침내 참여하지 않게 되고 허화평씨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창당작업 초기에는 한나라당쪽의 많은 의원들이 동참할 의사를 표명했다. 공천파동으로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이 궁지에 몰리자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대거 전국구 등에 배치해서 그들이 민국당(당시에는 당명이 정해지지 않았다)에 참여하는 것을 봉쇄했다.
당시 정가에는 민국당 문제가 중요문제가 되었고,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다.

< 공천탈락자들은 나쁜 정치인들인가? >
이런 상황에서 나는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김상현, 조순, 이수성씨 등과 함께 정당을 하게 되었는데, 재야출신으로 독자적인 진보정당건설에만 매진해온 나, 장기표가 과연 위와 같은 구시대정치인으로 인식되거나 군사독재 정권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나 자신 이분들과 함께 같은 정당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새시대개혁당 창당과정에서 조순, 이수성, 김상현, 신상우씨 등에게 신당창당에 나서줄 것을 제안한 바가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김윤환, 이기택, 허화평씨 등과 같은 정당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과 함께 정당을 할 수 있었던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들이 공천에서 배제된 이유와 이들을 공천에서 배제한 데 대한 당시의 국민여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이들 대부분은 최고보스의 견제를 받아 배제된 사람들이었고, 이들을 공천에서 배제한 데 대한 국민여론은 대단히 나빴다.

각 경우를 보자! 이기택씨의 경우, 만약 그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았다면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것이고,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경우 한나라당의 대통령후보는 이회창씨가 아니라 이기택씨가 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다른 여러 이유도 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영남사람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회창씨가 미리 이기택씨를 자른 것이다.
그리고 이회창씨가 이기택씨를 공천에서 배제한 것은 용남될 수 없는 일이다. 정치도의상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기택씨야말로 이회창씨에게 정당(민주당)을 하나 갖다 바친 사람이고 대선 후보인 이회창씨에게 중요한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다(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순씨가 양보함). 당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서 이런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것은 배은망덕이 아닐 수 없었고, 그래서 이회창씨가 당시에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다음으로 김윤환씨의 경우 그가 구시대 정치인의 대표적 인물이고 국회의원을 더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회창씨가 그를 공천에서 배제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군사독재 정권에서 온갖 지위를 누리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중대한 국면에서 그는 역사의 발전방향에 부응해서 행동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전두환씨더러 6. 29선언을 받아들이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민자당시절 김영삼씨가 대선 후보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신한국당시절 영남사람이 아닌 사람이 대선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회창씨를 대선 후보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김윤환씨가 공천에서 배제될 이유가 별로 없었거니와, 특히 그는 이회창씨 대통령 만들기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었는데, 이회창씨가 이런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한 것은 배은망덕의 표본이었다.

조순씨의 경우, 공천에서 탈락한 것은 아니고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김동수씨를 공천에서 탈락시킨 데 대해 항의하여 공천을 반납했는데, 이 경우도 김동수씨를 공천에서 탈락시킨 것은 조순씨를 제거하기 위한 이회창씨의 의도가 작용한 때문이었음이 너무나 분명했다.

김상현씨의 경우도 그가 공천에서 탈락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에 밉보였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상현씨가 정치를 오래 해서 구시대 정치인처럼 비치는 면이 있으나 김상현씨만큼 민주화는 물론 영호남 화합을 위해 애쓴 정치인은 드물다. 김상현씨를 그대로 둘 경우 DJ이후 김상현씨가 민주당을 장악할 것 같아 미리 공천에서 탈락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현씨는 뇌물을 받았다는 이유로 낙천자 명단에 포함된 바 있으나, 이미 무죄선고를 받은 상태였고 그런 정도의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그가 낙천자 명단에 포함된 것은 잘못이었다.

위와 같이 민국당 창당의 주역 가운데 상당수가 구시대 정치인의 이미지를 띠고 있긴 했으나, 이들은 구시대 정치인이란 이유로 공천에서 배제되었다기보다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이들을 공천에서 탈락시키자 여론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이회창 총재에 대한 비난이 거세어졌고, 바로 이런 일로 이회창씨는 비정한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나는 그 분들과 같은 정당을 하는데 대해 별로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당시 민국당에 대해 "잡탕밥"이라는 말이 나오고도 있어 이들과 함께 정당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으나 이들이 유별나게 나쁜 일을 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들 가운데 누구를 제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민국당의 초기 지지율 20%대 >
민국당(민주국민당)이 창당되기 전인 2월 하순경, 이런 저런 사람들(민국당 창당 주역들)이 창당을 하면 지지하겠느냐는 물음에 약 20%정도의 국민들이 지지할 뜻을 밝혔다. 이것은 당시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의 공천이 정치물갈이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인 지배체제의 구축 내지 정치보복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공천에서 배제된 이들을 동정하고 있었고, 민국당에 대한 지지율이 상당히 높았다.
내가 이들과 정당을 함께 한 것은 이런 사회정치적 분위기에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야 출신인데다 깨끗한 정치, 진보적인 정치를 고집해온 나 같은 사람이 이들과 함께 정당을 한 것이 잘 한 일이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다.

<나는 왜 민국당에 참여했나?>
2000년 초 나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으로부터 많은 입당요청을 받았다. 즉 그 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정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이들 정당이 지역당과 1인 지배체제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들 정당에 참여해서는 나의 독특한 정치이념을 구현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지만 나의 정치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정당을 창당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나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참여하지 않고 민국당에 참여했던 것이다. 민국당은 비록 나와는 전혀 다른 이념적 지향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연세가 많은데다 머지 않아 정계를 떠날 것 같았고 또 그들은 이미 정치적인 힘을 잃은 터라 내가 그럴듯한 주장을 펴면 내 주장에 상당정도 동조할 것 같았다.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내가 주도해서 만든 민국당의 정강정책은 대단히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다. 2000년 4.13 총선당시 나는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주장을 거의 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선거국면이어서 나의 진의가 충분히 전달될 수 없었을 뿐이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참여했다면 나는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내가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는데도 내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참여했다면 별로 비난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내가 민국당에 참여했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엊그제 10여년 이상 추구해온 독자정당에의 길을 중단하고 민주당에 참여했다. 이것이야말로 독자정당의 길을 중단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내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 참여했다고 해서 비난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런 비난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민국당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민국당 참여야말로 독자정당에의 길을 계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 고집을 꺽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런 비난에 대해 내 기분을 그대로 말하면 '당신들은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과 나의 목적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재야출신으로서 진보성향의 정당을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기성정당에 들어가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마땅하지 진보성향의 정당을 만들어 보기 위해 몸부림치는 행위(민국당 창당 참여)에 대해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그간의 나의 심정이었다. 이런 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나는 우리들끼리(진보성향의 젊은 동지들끼리) 독자적으로 정당을 할 수 있었다면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민국당 창당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만으로는 정당을 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무실조차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민국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사무실 유지와 정치활동비를 내가 부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의원이 쉽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국회의원이 되는 것보다도 정당다운 정당을 하나 만드는 것을 더 바라고 있었다.

민국당이 4.13 총선(2000년)에서 참패하고서 선배정치인들은 기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였다. 당사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윤환씨 같은 분은 일부러 나를 만나자고 해서 앞으로 선배들 가운데는 민국당을 끌고 갈 사람이 없으니 나더러 민국당을 책임지고 끌고 가라는 말도 했다. 나는 이런 때에 선배들을 잘 모시고 하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총선 참패 후 조순 선생이 총선패배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사표를 내셨다. 조순 선생이 물러날 경우 당내 사정이 복잡해질 것 같아 극구 만류했지만 기어이 사표를 내셨다. 이렇게 되니 김윤환씨가 대표권한대행을 맡게 되었다. 대표 유고시에는 최고위원가운데 고령자가 대표권한대행을 맡도록 한 규정 때문이었다. 김윤환씨가 대표최고위원을 맡게 된 직후 김대중대통령은 선거 후 각 당 대표들과 면담을 하게 되어 김윤환 대표가 김대중 대통령을 면담하게 되었다. 김윤환씨 같은 분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때부터 3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던 김윤환대표는 당 대표직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나는 초기에는 김윤환씨가 당대표가 되더라도 그 분과 함께 민국당을 키우는 것은 물론 정치다운 정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윤환 대표는 자신의 재판사건 때문에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활동은 일체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한 때는 나더러 민국당을 맡아서 끌고 나가라는 말까지 했었지만, 이제 내가 당무 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김윤환씨가 대표로 있는 한 내 뜻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표를 교체해서 김윤환씨가 당을 좌지우지할 수 없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승수씨가 대표를 맡는 방안, 김윤환씨와 이기택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내가 상임최고위원을 맡는 방안, 한승수씨와 내가 공동대표를 맡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또 이를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김윤환씨가 이런 방안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김윤환씨는 단독대표를 고집했다. 그래서 전당대회에서 결판을 내기로 했다. 전당대회를 통해 내가 당 대표가 되고자 했으나 당 선관위에서 대표경선 기탁금을 5천만원으로 결정하는 바람에 경선에 참여하지 못했다. 나는 돈도 없거니와 돈이 있다 하더라도 대표가 되기 위해 5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아 기탁금납부를 거부해서 경선에 참여하지 못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김윤환씨가 당대표가 되었다.
그 후 김윤환 대표가 당을 마비시키다 시피 하자 일부 지구당 위원장들이 반기를 들어 다시 전당대회가 열렸다. 전당대회가 우여곡절 끝에 무산된 후 민국당은 김윤환 대표측이 우위를 점한 당무위원회에서 민주당, 자민련과의 '3당 정책연합'(3당 연정)을 결의했다.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는 민주당과 정책연합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거니와 더욱이 김윤환 대표가 자신의 개인적 신상문제 때문에 당을 이 모양으로 끌고 가고 당무위원들도 이에 동조하는 한 더 이상 이 당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이미 김윤환씨는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있었다. 다만 당대표로 있는 점을 고려하여 법정 구속이 유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3당 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 민국당을 탈당했다.

사실 민국당이 잘 되었다면 나의 정치적 꿈을 펼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한국정치가 이토록 지역대립의 정치가 되지 않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을 텐데,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하고 '김윤환씨 당'으로 전락한 채 부끄러운 모습으로 되어 갔다.
뒷 부분에서 민국당이 잘 되었어야 할 이유를 좀 더 소상히 밝히겠거니와 어쨌든 나의 민국당 참여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민국당은 과연 지역감정을 선동했나>
민국당의 주요 간부들 가운데는 영남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어찌보면 '영남당'으로 비칠 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민국당에는 강원도 출신의 조순 대표와 한승수 의원, 호남 출신의 김상현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 이수성 전 총리와 나 같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어서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영남당'으로 간주되는 한나라당이 있었기 때문에 민국당이 영남당이 되기는 어려웠고 자연히 특정지역을 초월한 정당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조순 대표 같은 분은 영남당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민국당은 지역감정을 선동한 것으로 알려졌었고,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남출신 정치인들이 많은 것도 그 이유였지만, 김광일씨의 발언이 더 큰 이유였다. 민국당의 최고위원이기도 했던 김광일씨가 '민국당이 실패하면 부산 사람들은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는 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생각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이 발언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도 문제의 그 발언을 들었는데 김광일씨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은 민국당을 두고 대가리(우두머리)가 많아서 잘 안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 지도부가 이토록 큰 수모를 겪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열해서 민국당이 망하면 우리 지도부는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있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실제로 민국당에는 지도급 인사들이 너무 많아서 잘 안될 것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이를 경계한 말이었다. '영도다리'라는 말이 들어가서 선정적일 수는 있었으나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발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민국당이 실패하면 부산사람들은 모두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갓 창당한 당이고, 민국당이 '부산당'도 아닌 터에, 민국당이 잘 안 된다고 해서 부산사람들이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김광일씨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논리적으로도 그런 발언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광일씨가 이런 발언을 한 것처럼 인식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김광일씨가 TV토론에서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일이 있었는 데다 김영삼 전대통령을 자주 찾아감으로써 영남지역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김광일씨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일도 있다.

김광일씨의 발언이 아니더라도 민국당은 영남에 의존하려는 듯한 모습을 많이 나타내 보였다는 점에서 비난받을 점이 있었다고 본다. 민국당이 호남에서 큰 지지를 받을 수는 없는 것이고 한나라당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나라당과 '영남쟁탈전'을 벌이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영남지역에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지역감정을 선동한 일은 별로 없었다. 김대중 정부를 비판함으로써 지역감정을 부추긴 듯이 보인 점이 다소 있었겠으나 민국당이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추긴 일은 없다. 따라서 민국당이 지역감정을 선동해서 득표코자 했다고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민국당은 잘 됐어야 한다>
민국당은 그 구성원들로 보아 세인의 지탄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한국정치를 새롭게 해볼 수 있는 주요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다. 조순, 이수성, 김윤환, 이기택, 김상현, 신상우, 박찬종씨 등과 내가 최고위원을 맡았거니와 특히 지구당 위원장들 가운데 지역당구도와 금권정치에 희생되어 새로운 정치를 해 보려는 젊은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았다. 잘만 가꾸어 가면 지역당구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념과 정책을 갖춘 정당을 만들 수 있었다. 선거에 참패한 이후에도 위에서 열거한 분들이 힘을 합해서 국민에 봉사하면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는 정치활동을 했다면 국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국회의원수가 2석에 불과했지만 의석분포상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의석 2석을 여·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국민적 정당성이 있는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국민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민국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 되어 국민의 지지를 상당정도 확보했다면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 모두 국민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만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권력의 상당부분을 할애받고 연립정부구성에도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정치자금이 부족해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었는데 민국당은 1년에 국고조보금을 8억원이나 받고, 특히 2002년도와 같이 선거가 두차례 있는 경우에는 연간 30억원이 넘는 돈을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정치자금만 있다면 의미있는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만약 민국당의 대표가 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한국정치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던 것이다.

<나의 민국당 참여는 실수가 아닌 실패>
위와 같은 이유와 목적으로 나는 민국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내가 꿈꾸던 정당의 기반도 마련하지 못하고 국회의원도 되지 못하면서 나의 이미지만 나쁘게 했다. 결국 나의 민국당 참여는 실패로 끝났다.
결과를 놓고 보면 내가 민국당에 참여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으나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만약 민국당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에 내가 만들고 있던 새시대개혁당이라도 만들어서 선거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인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국당이란 제3의 정당이 뜨고 그 당에서 후보를 모집하는 한 나와 함께 하고 있었던 많은 동지들이 민국당에 참여하려고 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은 민국당이 형편없는 정당으로 치부되지만 그 당시에는 지지율이 20% 정도나 될 정도로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그 당으로 참여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민국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당을 결성해서 선거에 참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곧 2000년 4월 총선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했어도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대로 있었다면 구시대정치인과 함께 어울렸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능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와 더불어 정치를 하겠다고 모여드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의 민국당 참여는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고, 그러기에 나의 민국당 참여는 실수가 아니라 실패였던 것이다. 즉 하지 않았어야 할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어서 했고 또 잘만 했더라면 아주 좋은 일이 될 수 있었는데, 나의 능력부족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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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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