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생각나는 일들
장기표의 시사논평 / 2011. 1. 3. 01:50
연말에 생각나는 일들
2010년 경인(庚寅)년은 역사상 여러 모로 뜻이 있는 해였습니다. 우선 온 국민에게 천추의 한이었던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 되는 해였고 이와 관련되어 민족 광복의 기쁨을 가져 온 해의 65년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등 역사연대에 매듭짓는 기념일이 많은 해였습니다.
일본 식민지가 된 지 100년, 그로부터 해방된 지 65년이라 하여 개인적으로 뭐 뾰족한 일이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국가적으로 뜻있는 변화가 있을 법도 하다는 것이 연초의 막연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지난 1년 동안에 한일 양국 사이에는 우호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였으며 양국 뜻있는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 이를 위한 학술회의나 공동 성명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깊이가 별로 없고 정치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웠습니다.
금년 들어 중국의 국제적 경제적 위치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그의 위세에 힘입은 듯 북한의 한계선에 가까운 호전성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김정일 치하의 일부 지도자는 심지어 남한에 대한 핵공격을 공개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지나친 무력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도 다급해졌습니다. 중국 어선의 일본 영해 내에서의 행패로 중국과 가벼운 외교문제도 일으켰던 일본은 이번에는 그들 특유의 ‘핵 알레르기’ 까지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육자회담에서 한ㆍ미ㆍ일은 공동으로 이북과 중국에 대처해 왔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세력 판도가 한 세기 전과는 달라진 지금에 와서 일본의 가는 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 혼자만의 걱정일까요.
일본 식민지시대를 겪고 살아남은 저로서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이 몰고 온 긴장 속에 맞이한 올해 마지막 달에도 거의 70년 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어난 세계 제2차 대전의 충격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름 뒤인 23일, 이번에는 연평도 부근의 우리 포격훈련에 대한 북한의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온 나라가 긴장해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 천황 희수(喜壽)를 축하하며 일장기를 흔드는 3만 명 가까운 하객이 일본 궁성을 방문했다는 뉴스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1933년 12월 23일 당시의 쇼와(昭和) 천황은 첫 아들을 가졌습니다. 딸만 넷을 가진 뒤 세자(世子) 문제로 온 나라가 근심하던 중에 얻은 아들이라 축하행사가 전국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한 탄광촌의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저는 학교에서 홍백의 축하 찰떡을 받고 저녁에는 군악대가 선두에 선 제등 행렬에 참가했습니다. 금년에 77세 희수를 맞이한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성장기(成長期)의 태반을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 교육을 받고 자란 저는 그들의 역사나 문화를 꽤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맹목적이요, 신앙에 가까운 것으로 외국인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하는 부분입니다.
저의 중학(현 고등학교) 일본인 동기생 한 친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당시, 학도병 출신 소위로 쓰시마(對馬島) 경비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홀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경남 진주에서 패전을 맞이하여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친척이 있는 고향에서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아들의 유골과 유품 뿐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패전 소식을 듣고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던 것입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두고 패전으로 자유를 찾은 시점에서 자결을 한 그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패전 후 자기 목숨을 끊었고, 그들을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천황이 전쟁범죄자로 처벌되지 않기를 원하는 일본인이 많았습니다. 연평도 포격 여파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많은 일본인은 12월 23일 궁성을 찾아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북한정세를 구실로 군비확장을 꾀하고 일부에서는 핵개발의 필요까지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0여 년 전 국론 분열과 민족 갈등으로 나라를 혼미 속에 빠뜨려 끝내는 망국의 비애를 맞은 고사(故事)를 교훈 삼는 한편, 이웃나라의 움직임과 그들의 유별난 국민성에도 관심을 가져, 경제발전 도상에 일어난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슬기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합니다.
2010년 경인(庚寅)년은 역사상 여러 모로 뜻이 있는 해였습니다. 우선 온 국민에게 천추의 한이었던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 되는 해였고 이와 관련되어 민족 광복의 기쁨을 가져 온 해의 65년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한국전쟁 60주년이 되는 등 역사연대에 매듭짓는 기념일이 많은 해였습니다.
일본 식민지가 된 지 100년, 그로부터 해방된 지 65년이라 하여 개인적으로 뭐 뾰족한 일이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국가적으로 뜻있는 변화가 있을 법도 하다는 것이 연초의 막연한 제 생각이었습니다.
면밀히 살펴보면 지난 1년 동안에 한일 양국 사이에는 우호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였으며 양국 뜻있는 학자와 지식인 사이에 이를 위한 학술회의나 공동 성명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다 깊이가 별로 없고 정치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어서 아쉬웠습니다.
금년 들어 중국의 국제적 경제적 위치가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그의 위세에 힘입은 듯 북한의 한계선에 가까운 호전성이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김정일 치하의 일부 지도자는 심지어 남한에 대한 핵공격을 공개적으로 위협할 정도로 지나친 무력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본도 다급해졌습니다. 중국 어선의 일본 영해 내에서의 행패로 중국과 가벼운 외교문제도 일으켰던 일본은 이번에는 그들 특유의 ‘핵 알레르기’ 까지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육자회담에서 한ㆍ미ㆍ일은 공동으로 이북과 중국에 대처해 왔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세력 판도가 한 세기 전과는 달라진 지금에 와서 일본의 가는 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 혼자만의 걱정일까요.
일본 식민지시대를 겪고 살아남은 저로서는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이 몰고 온 긴장 속에 맞이한 올해 마지막 달에도 거의 70년 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일어난 세계 제2차 대전의 충격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름 뒤인 23일, 이번에는 연평도 부근의 우리 포격훈련에 대한 북한의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고 온 나라가 긴장해 있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일본 천황 희수(喜壽)를 축하하며 일장기를 흔드는 3만 명 가까운 하객이 일본 궁성을 방문했다는 뉴스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1933년 12월 23일 당시의 쇼와(昭和) 천황은 첫 아들을 가졌습니다. 딸만 넷을 가진 뒤 세자(世子) 문제로 온 나라가 근심하던 중에 얻은 아들이라 축하행사가 전국적으로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후쿠오카(福岡)의 한 탄광촌의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저는 학교에서 홍백의 축하 찰떡을 받고 저녁에는 군악대가 선두에 선 제등 행렬에 참가했습니다. 금년에 77세 희수를 맞이한 지금의 아키히토(明仁) 천황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성장기(成長期)의 태반을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 교육을 받고 자란 저는 그들의 역사나 문화를 꽤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거의 맹목적이요, 신앙에 가까운 것으로 외국인인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하는 부분입니다.
저의 중학(현 고등학교) 일본인 동기생 한 친구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당시, 학도병 출신 소위로 쓰시마(對馬島) 경비대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홀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경남 진주에서 패전을 맞이하여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건너가 친척이 있는 고향에서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아들의 유골과 유품 뿐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패전 소식을 듣고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던 것입니다.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두고 패전으로 자유를 찾은 시점에서 자결을 한 그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패전 후 자기 목숨을 끊었고, 그들을 전쟁의 수렁으로 밀어 넣은 천황이 전쟁범죄자로 처벌되지 않기를 원하는 일본인이 많았습니다. 연평도 포격 여파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면서도 많은 일본인은 12월 23일 궁성을 찾아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북한정세를 구실로 군비확장을 꾀하고 일부에서는 핵개발의 필요까지 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0여 년 전 국론 분열과 민족 갈등으로 나라를 혼미 속에 빠뜨려 끝내는 망국의 비애를 맞은 고사(故事)를 교훈 삼는 한편, 이웃나라의 움직임과 그들의 유별난 국민성에도 관심을 가져, 경제발전 도상에 일어난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슬기로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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