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도발, MB와 DJ
장기표의 시사논평 / 2010. 11. 28. 23:23
연평도 도발, MB와 DJ
정전 이후 북한의 연평도 도발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1999년과 2003년에 두 차례의 연평도 해전이 일어났었고, 이어 지난 23일 연평도 피격이 세 번째 도발이다.
먼저 첫 번째 도발을 살펴보자.
1999년 6월15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함정에 포격을 가하면서 이른바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 경비정 4척과 어뢰정 3척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우리 함정에 고속 접근했다.
이에 우리 고속정편대가 맞대응하며 충돌을 시도하자 북한은 3척의 경비정을 더 충원해 총 10척이 우리 측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과 25mm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에 즉각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 해전 발발 14분 만에 북한 해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1999년 6월 15일의 제1연평해전이다.
남북한 해군이 벌인 해상전투 결과,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됐고 중ㆍ대형 경비정 2척이 반파돼 기동불능상태로 예인됐을 뿐만 아니라, 소형 경비정 2척도 파손되어 사상자가 무려 100여명에 이르렀다.
반면 우리 해군의 피해는 초계함 1척과 고속정 4척의 기관실 및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9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우리 해군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는 6.25이후 최대의 정규전에서 승리한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째로 북한은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다.
경고방송에도 북한 경비정의 남하가 계속되자 우리 해군 고속정이 밀어내기를 시도했고, 북한의 함포사격으로 고속정 1척이 화염에 휩싸여 침몰했다.
그러나 20분 동안의 교전으로 비록 우리 측이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했으나, 북한은 무려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역시 우리 측이 압승을 거운 것이다.
이 두 번의 연평도 도발 모두 바로 ‘햇볕정책’을 추구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때다.
즉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남북 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에 대비 철저한 응징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대북강경책을 앞세우던 이명박 정부 하에서 발생한 세 번째 연평도 도발은 어떤가.
이명박 대통령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북한의 연평도 공격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첫 메시지는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잠시 뒤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로 수정됐다가 오후 4시30분쯤 비공식 브리핑에서 또 다시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어 오후 8시 40분 김희정 대변인이 전한 이 대통령의 이야기는 또 달라졌다.
이 대통령이 내린 지시는 '몇 배로 응징하라', '경우에 따라서는 해안포 부근에 있는 미사일 기지를 타격하라'고 했다는 것.
이처럼 청와대조차 이 대통령이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이 무슨 수로 이 대통령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작전 지침을 어떻게 내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연평도가 불바다가 되고, 해병대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는가 하면, 민간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측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연평도가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는데도 북측에서는 그런 징후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태영 국방장관이 “안개 때문에 관측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정말 웃기는 얘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연평도 포격전은 우리 측의 참패다.
말로는 ‘대북강경책’을 떠벌려 놓고도 정작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가서는 우물쭈물 거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안보관이 빚은 참담한 결과다.
차라리 ‘햇볕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북측의 도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보관이 백배는 더 훌륭하지 않는가.
정전 이후 북한의 연평도 도발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1999년과 2003년에 두 차례의 연평도 해전이 일어났었고, 이어 지난 23일 연평도 피격이 세 번째 도발이다.
먼저 첫 번째 도발을 살펴보자.
1999년 6월15일 북한 경비정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함정에 포격을 가하면서 이른바 '연평해전'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 경비정 4척과 어뢰정 3척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해 우리 함정에 고속 접근했다.
이에 우리 고속정편대가 맞대응하며 충돌을 시도하자 북한은 3척의 경비정을 더 충원해 총 10척이 우리 측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과 25mm 기관포 사격을 가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기습공격에 즉각 40mm와 76mm 기관포로 응사, 해전 발발 14분 만에 북한 해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것이 이른바 1999년 6월 15일의 제1연평해전이다.
남북한 해군이 벌인 해상전투 결과,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이 침몰됐고 중ㆍ대형 경비정 2척이 반파돼 기동불능상태로 예인됐을 뿐만 아니라, 소형 경비정 2척도 파손되어 사상자가 무려 100여명에 이르렀다.
반면 우리 해군의 피해는 초계함 1척과 고속정 4척의 기관실 및 선체 일부가 파손되고 장병 9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는데 그쳤다.
우리 해군이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는 6.25이후 최대의 정규전에서 승리한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두 번째로 북한은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2002년 6월 29일 북한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했다.
경고방송에도 북한 경비정의 남하가 계속되자 우리 해군 고속정이 밀어내기를 시도했고, 북한의 함포사격으로 고속정 1척이 화염에 휩싸여 침몰했다.
그러나 20분 동안의 교전으로 비록 우리 측이 윤영하 소령 등 장병 6명이 전사했으나, 북한은 무려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역시 우리 측이 압승을 거운 것이다.
이 두 번의 연평도 도발 모두 바로 ‘햇볕정책’을 추구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때다.
즉 김대중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남북 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북한의 도발에 대비 철저한 응징을 가한 것이다.
그런데 대북강경책을 앞세우던 이명박 정부 하에서 발생한 세 번째 연평도 도발은 어떤가.
이명박 대통령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 북한의 연평도 공격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첫 메시지는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잠시 뒤 '확전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로 수정됐다가 오후 4시30분쯤 비공식 브리핑에서 또 다시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어 오후 8시 40분 김희정 대변인이 전한 이 대통령의 이야기는 또 달라졌다.
이 대통령이 내린 지시는 '몇 배로 응징하라', '경우에 따라서는 해안포 부근에 있는 미사일 기지를 타격하라'고 했다는 것.
이처럼 청와대조차 이 대통령이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군이 무슨 수로 이 대통령의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작전 지침을 어떻게 내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했다.
연평도가 불바다가 되고, 해병대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는가 하면, 민간인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측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연평도가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는데도 북측에서는 그런 징후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태영 국방장관이 “안개 때문에 관측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정말 웃기는 얘기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번 연평도 포격전은 우리 측의 참패다.
말로는 ‘대북강경책’을 떠벌려 놓고도 정작 행동이 필요한 시점에 가서는 우물쭈물 거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안보관이 빚은 참담한 결과다.
차라리 ‘햇볕정책’을 추구하면서도 북측의 도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응징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보관이 백배는 더 훌륭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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