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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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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1. 정보화시대 의 필수품, 한글의 우수성

21세기의 벽 두, 우리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이지요.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합니다. 세상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 며칠 걸렸죠?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ㆍ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지요? 세상에 이런 문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한민족 고유종교인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간다고 예고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봐요. 히라까나 가타카나를 쓰는데 이걸 외워서 타이핑하려면 골치 좀 썩을 겁니다. 중국을 봐요. 한자를 컴퓨터로 입력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다 아실 겁니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 정말 대단한 문자입니다.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단연 세계 최고의 문자입니다.

2.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신하들의 창작품일까?




2년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한글과 관련된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지요. 한글은 집현전 학사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리어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이 알면 모화사대(慕華事大)에 어긋난다고 반대할까봐 아예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는데 뭘 갖고 작업을 하셨을까요?
조선시대 어떤 학자는 몽골 글자(蒙字)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때 라마승 파스파가 만든 파스파문자란 뜻이죠. 그런데 그것을 한글과 비교해보면 한두 글자 빼고는 닮은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거 아닐까? 라고 했는데 역시 한두 글자 빼고는 전혀 안 닮았습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군요. ^^;

3. 한글은 고조선문자



옛 전자(篆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다른 나라 문자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자를 개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고조선 3세 단군이신 가륵 임금 때입니다. 단군께서 신하인 삼랑(관직명) 을보륵에게 명하셔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환단고기』)

이게 한글의 첫 작품입니다. 이것은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사용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4.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글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건너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요.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했는데요.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되었습니다.
 
5. 인도로 간 한글

가림 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에 인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송호수 교수님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했지요.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주로 드라비다인(후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
하다고 하지요.

가림토 문자가 건너간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단고기』「단군 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희안한 인종이라고 하지요.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드라비다인은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하는군요. 언어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 ^^;
여기서 쌀과 메디, 벼 등을 통해 농업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따라서 쌀과 메디, 벼는 우리말이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이 보인다는 군요. 고조선의 과하마가 건너간 모양입니다.
이처럼 고조선시대에 인도와 우리나라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시대는 팍스 코리아시대였어요.(멋지다 ^^)

우리나라는 4천 년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가림토문자은 공용문자로 사용되었겠지요.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오해한 것이지요.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지요.

6. 한문의 기원은 배달국의 녹도문

다음은 한문에 대 해 알아보지요.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습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창일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 그림을 보세요.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 바 녹도문입니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지요.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습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입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지요.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입니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죠.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입니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습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지요.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죠.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입니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요.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지요.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입니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습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지요.





한국의 역사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민족의 역사는 대륙에서 전개되었다.


우리나라 고대사를 말해주는 책중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지나인들이 저술한 책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인들이 쓴 책의 내용중에도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무대가 대륙이라고 쓰여진 역사서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백제의 요서지방 경략설도 따지고 보면 중국의 이십오사가 하나 같이 백제가 존재했던 위치가 요서라고 밝히고 있어 한반도에 일단 백제가 있다는 가정아래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무리한 주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또 신라 진흥왕때의 국경이 한때 중국 북경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구절도 그렇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여기저기 유세하고 다니던 소진은 연라의 문후(B.C. 438∼415) 에게 찾아가 [연의 병권을 주면 천하를 통일 할 수 있다]하면서 연의 지리를 설명하였는데, [연의 동쪽엔 조선이 있고 요동이 있으며 북쪽엔 임호가 있고 누번이 있으며...]라는 식으로 가까운 곳부터 먼곳을 말하였다. 이 말에 의하면 단군조선의 위치는 요동의 서쪽인 중국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 역시 쓰여지는 지명이 한반도에 쓰여지지 않는 지명이 많지만 대륙에선 발견된다며 삼국사기의 무대도 중국대륙이라는 주장역시 전부터 있어왔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의 천체관측 기록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구성해보니 관측지점이 중국대륙이라는 것이다.


■1. 고구려의 대륙사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요녕성(요동반도) 서쪽에 있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지역인 요녕성의 동부 일대까지만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요하가 고대에는 압록하, 압록수 등으로 불렸다고 [삼국유사]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대사에 등장하는 요수(遼水)는 현재 하북성에 있는 난하( 河:북경앞)이며, 이는 중국의 고지도 뿐만 아니라 많은 문헌에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당시 요수로 불렸던 현재의 난하를 기준으로 하여 요동(遼東) 요서(遼西)가 모두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는 고구려 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3년에 요서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3년 봄 2월,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에 대비하였다.]

요서에 10개나 되는 성을 쌓았다면 이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임은 당연지사가 아닌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위와 같은 내용만 말할 뿐 당시 요서 지역에 쌓았다는 10개의 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으나, <태백일사>에는 이들 10개 성터들의 이름과 위치까지 밝혀놓았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태조(太祖) 융무(隆武:태조의 연호) 3년,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10성에 대비하게 하였다. 첫째 안시(安市) 개평부 동북쪽 70리에 있고, 둘째 석성(石城)은 건안의 서쪽 50리에 있다. 셋째 건안은 안시의 남쪽 70리에 있으며, 넷째 건흥(建興)은 난하( 河)의 서쪽에 있다. 다섯째 요동(遼東)은 창려(昌黎)의 남쪽에 있고, 여섯째 풍성(豊成)은 안시의 서북 100리에 있다. 일곱째 한성(漢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있으며...]

이상의 성터들은 모두 하북성에 있는 난하를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포진해 있었다. 요서에 쌓은 10개의 성은 당시 요수로 불렸던 현 난하의 서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쌓은 두성을 합하면 모두 12개가 되지만 통산 요서 10성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12개의 성터 중에 안시성(安市城)과 건안성(建安城)·요동성(遼東城)·백암성(白岩成) 등은 당시 요수였던 난하의 동쪽에 있었고, 나머지는 난하의 서쪽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의 사학계는 이들 성터는 모두 요녕성에 있는 현 요하의 동쪽에 표기하여 이 지역만이 고구려의 강역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의 요서 10성의 기록은 요동과 요서의 혼동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부식이 정신찬락이라도 일으켰단 말인가? 나아가 당시 이 기록을 보았을 임금을 비롯하여 여러 학자와 선비들이 모두 까막눈이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더구나 고구려에서 요서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것은 <삼국사기> 이후 조선왕조 때 편찬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나라가 고구려를 1차로 침입했을 때 당태종이 요수(현재의 난하)를 건너 먼저 요동성을 공략한 뒤에 바로 백암성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현재의 난하를 요수로 표기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고지도 및 문헌들의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며, 이는 현재의 지명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요동성과 백암성을 공격한 당나라 군사가 다시 건안성(建安城)과 안시성(安市城)을 공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요수로 불렸던 현재의 난하 일대가 고구려의 핵심부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보루였기 때문이다. 결국 당태종은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한쪽 눈을 잃고 물러가야 했다.
당태종이 공략했던 건안성과 안시성 역시 난하의 동쪽에 있었는데, 특히 안시성은 옛 번조선(번한)의 도읍지인 왕검성(王儉成)에 있던 성터였다. [삼국사기]도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다."고 하여 [태백일사]와 일치된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하북성 난하 일대에 10성을 쌓은 것은 이 지역이 고구려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며, 이는 [삼국사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제가 고구려 침략을 앞두고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무리가 혼미불공하여 발해(渤海)와 갈석사이에 군중을 모아 요(遼)와 예맥의 땅을 잠식하니...]

여기서 발해는 하북성 남쪽의 바다이며, 갈석은 갈석산으로, 실제로 이 지역이 고구려의 핵심 요충지역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고구려가 요서에 쌓은 성들중 용도성은 원래 번한에서 쌓은 성터로, 후에 연개소문이 이름을 고쳐 고려진(高麗鎭)이라고 하였으며 그 위치는 현 북경(北京)의 북쪽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다.]

안정문(安定門)은 북경 도성의 동북쪽에 있는 성문으로, 지금도 이 명치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발행되고 있는 지도에서 북경의 북쪽에 고려영(高麗營)이라고 표기한 곳이 바로 옛 용도성, 즉 고려진이 있던 곳이다. '고려영'이란 '고구려의 진영'이란 뜻으로, 중국의 지도 역시 이곳이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대명일통지>에도 "조선의 성이 영평부 경내에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영평부는 명나라 때 북경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요서에 쌓은 10성 중에는 한성(漢城)도 남아있는데, 현재 하북성에는 한성(韓成)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훗날 고구려에서 세 곳에 신성을 쌓았는데, 현재 하북성 여러 곳에 신성과 신성자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옛 고구려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청시대에 제작된 지도, 난하가 요수라고 분명하게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이 섬으로 그려졌을 정도로 17세기까지 한반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구려의 평양성도 요서에 위치했었다.
고구려 동천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기 전에 도읍하고 있던 환도성도 이 일대에 있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안시성은 옛 안촌홀이며, 환도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지리 편의 이러한 기록은 안시성과 환도성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현재 난하(옛 요수) 동쪽에 있는 승덕시 남쪽에는 도산(都山) (1,846)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어 옛 환도산(丸都山) 과의 연관성을 짙게 충기고 있다.
<삼국사기> 16대 고국원왕때의 기록을 보아도 평양성과 환도성이 매우 인접한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국원왕은 평양성에서 환도성으로 옴겨갔다가 다시 선비족의 침입을 받아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왔는데, 이는 이들 성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삼국사기>에서 안시성이 곧 환도성이라고 한 것도 이들 성터가 모두 인접한 곳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그후 20대 장수왕에 이르러 다시 평양으로 천도하게된다.



■2. 백제의 대륙영토


고구려가 전성기에 중원대륙의 어디까지 진출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대륙에 있었던 백제의 영토부터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의 본류도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며, 특히 백제가 대륙에도 존재했었다는 것은 중국의 25사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태백일사>에 기록된 백제의 대류지배 사실부터 살펴보자.

[고구려는 백제와 밖에서 경쟁하며 함께 있게 되었다. 요서땅에서 백제가 영유한 곳을 요서(遼西)·진평(陳平)이라 한다.]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그 일부를 다스렸으며 이를 요서군(遼西君)과 진평군이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백제가 다스리던 요서와 진평은 산서성과 하북성 남단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일대에 진(晉)나라가 있었는데 진평(晉平)이라는 명칭도 남아있다.
그러나 백제의 대륙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태백일사>의 기록을 보자.

[백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제(濟)·노(魯)·오(吳)·월(越) 등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하였으며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땅을 나누어 왕과 제후를 봉하였다.]

제·노·오·월 등의 나라가 있던 곳은 옛 조선시대에 동이족의 갈래인 레이·서이(徐夷)·회이(淮夷)등이 거주하던 곳이며 현 산동성·안휘성·강소성·절강성 등의 지역으로 중국의 동쪽 해안과 인접한 곳이다. 백제는 이들 지역을 다스렸으며, 신라도 그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벡제가 중원의 일부를 다스리고 있던 이 시기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해당하는데, 이러한 백제의 중원 지배 사실을 남북조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25사를 통해 확인해 보기로 한다.
먼저 <송서(宋書)>의 기록을 보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를 다스렸다. 백제가 다스린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백제가 제·노·오·월 등지를 차지하기 전에 먼저 요서에 진평군을 설치했다는 말이다. 또 <양서>와 <남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제 역시 (요서에) 웅거하면서 요서(遼西)와 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百濟君)을 설치하였다.]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한 뒤 이를 백제군이라했다는 기록이다.

또한 백제 동성왕때 후위가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침략했으나 패하여 돌아갔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10년,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치러 왔으나 패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대륙에 있던 후위가 백제를 침략했다가 오히려 패했다는 말이다. <삼국사기 뿐 아니라 <남제서>와 <자치통감>에도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기존 한계에서는 흔히 한반도에 있던 백제가 해외로 진출하여 중원의 일부를 차지한 것으로 말하고 있으나,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처음 건국한 곳이 대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중국의 문헌들 중에도 백제가 대륙에서 건국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기록이 많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제가 대륙에서 시작하여 한반도로 진출한 것이지, 결코 한반도에서 생겨나 대륙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앞서 25사를 통해 살펴본 백제의 대륙영토는 실로 광대한데, 멀리 한반도에서 진출해온 세력이 이만한 넓이의 땅을 개척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당시 백제의 중심세력이 대류에 있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25사의 기록들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보자.
먼저 <주서(周書)>에는 백제에 대해 "처음 나라를 대방(帶方)에서 시작하였다"고 하였으며, <수서(隨書)> 역시 "그 나라는 대방(帶方)의 옛 땅에서 처음 일어났다."고 하여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대방(帶方)이란 하북성 남단과 산동성, 상서성 일대를 포함하는 황하 하류지역을 말한다. <한서> 지리지에도 낙랑과 대방은 모두 요서군(遼西郡)에 속한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결국 백제가 요서에 진평군과 요서군을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대방이 요서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백제는 패수(敗數)와 대수(帶水)의 두 강을 건너 나라를 세웠다고 똑똑히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두 강 역시 대방(帶方)에 있던 대수와 하북성에 있던 패수를 가리킨다.
또한 25사의 하나인 <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백제국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북쪽으로 가면 고구려가 천여 리에 있으며, 작은 바다의 남쪽에 처해있다.]

여기서 '작은 바다'란 하북성과 상동성을 끼고 있는 발해만을 말하는 것이며, 그 바다의 남쪽에 백제가 있다는 것은 황하의 남쪽인 상동성 아래쪽으로 백제가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가 하북성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으니, 김부식은 최치원전에서 지금은 전하지 않는 최치원의 문집인 <상대사시중장>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吳)·월(越)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幽)·연·제(濟)·노(魯) 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 때 남으로는 양자강 남쪽 일대까지 차지했었고 북으로는 하북성의 옛 연나라와 유주는 물론 제·노 등지까지 차지했었다는 이 기록은 앞서 살펴본 25사의 기록들은 물론이고 이미 검토한 고구려의 역사와도 일치한다.
훗날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의 일부가 신라의 영토가 되면서 한반도 일대의 강역도 자연스럽게 신라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하북성에서 요녕성에 이르는 고구려의 핵심 강역은 발해와 말갈이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3. 신라의 대륙 영토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학설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발표한 바 있으며, 다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백제와 신라의 대륙 존재설은,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 가운데 기상과 기후, 중구가의 거리, 고대의 지명, 특산물, 삼국의 인구, 일식과 월식의 관측지, 지리적 한계 등이 모두 삼국이 대륙에 있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며, 따라서 신라 역시 대륙에서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먼저, 25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신라가 어디에서 처음 건국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구당서(舊唐書)>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라국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로는 백제와 접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는 천리이며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옛 번한에 속한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변한이란 다름 아닌 번한(번조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역시 25사를 인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이르기를 "변한의 후예들이 낙랑 따에 있다."하였다.]

계속해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한지(전한서·후한서)를 살펴보건대 낙랑군은 낙양에서 동북으로 5천리에 있으며, 주(柱)에 말하기를 유주(幽州)에 속하며 옛 조선국이라 한다.]

낙랑은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주(幽州)에 속하며, 이곳 역시 옛 번조선의 강역이었으니 옛날의 조선국이라 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이다. 다만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이므로 신라가 하북성 남단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가 댈륙에서도 남쪽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구당서>에서 도오가 남이 바다로 막혔다고 한 것도 대륙 동남부의 지형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대륙의 일부는 물론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까지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동신라라 남신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 경애왕때 기록에는 이러한 구절이 있다.

[당(후당)의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懷化)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은 중흥전으로 불러 물품을 하사하였다.]

신라의 천주 절도사로 있던 왕봉규가 신라의 강주를 관할하는 권지강주사가 되어 있었는데 후당의 명종이 다시 회화(懷化) 대장군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천주가 속한 복건성의 서쪽에 광동성이 있는데 강주는 바로 이곳에 속해 있던 지명이며, 현재의 지도에는 강녕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회화(懷化)는
호북성에 있었던 지명으로, 지금도 회화(懷化)시로 남아있다.
한편 방향을 돌려 복건성 북쪽으로 올라가면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에 닿는데, 이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족에 신라산(新羅山)이라고 뚜렷하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산의 임해(臨海)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 21대 소지마립간때의 기사이다.

[15년 가을 7월에 임해(臨海)와 장령 두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왜적(倭賊)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臨海君公)이라는 통작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다시 39대 소성왕 2년의 기사를 보자.

[여름 4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 임해(臨海)와 인화(仁化)의 두 문이 무너졌다.]

또 46대 문성왕 때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내용도 있다.

[9년 봄 2월, 평의와 임해(臨海)의 두 전(殿)을 준수하였다.]

또 47대 헌안왕때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과 회동했다.]

48대 경문왕때에도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9대 헌강왕때의 기사에는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상 임해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더라도 신라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중국의 고지도에서 임해현에 신라산을 표기하고 있는 것은 대륙신라설을 확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또, <태백일사>에는 고구려 문자명왕이 백제의 요서군을 폐하면서 신라의 백성을 복건성 천주(泉州)라는 곳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대륙의 절강성 일대에 있던 신라의 백성을 그 남쪽인 복건성 천주로 옮겼다고 설명이 된다.
한편 신라산이 표기된 임해는 절강성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사실 역시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신라 41대 헌덕왕 8년 때의 기록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절강 동쪽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

신라에 흉년이 들자 절강성 서쪽에 있는 복건성과 강서성 일대의 주민 170여 명이 동쪽에 있는 절강성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는 정확한 기록이다.

한편 고구려가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면 당시 신라와 백제의 남쪽까지도 진출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그 땅은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남과 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절강성 동쪽에는 동지나해라는 큰 바다가 있으며,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도 "바다 남쪽에 동이가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북쪽과 남쪽에도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를 고구려가 차지한 뒤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영토가 '개의 이빨'처럼 얽혀 있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부여(북부여) 제실(帝室) 출신의 파소라는 여인인데, 이 파소는 훗날 선도산(仙桃山)의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선도산의 신모(神母)"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선도산의 지선(地仙)"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선도
(仙桃)는 대륙의 여러 곳에서 사용된 지명으로, 현재에는 양자강 북쪽의 호북성에 선도(仙桃)시라는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지명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고대 지도에는 선도산(仙桃山)과 음이 같은 선도산(仙都山)이라는 산이 양자강 남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 위치는 신라의 임해전과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 남쪽과 복건성, 강서성의 경계 지점이다. 이곳에 표기된 고대의 선도산을 현재의 중국지도는 무이(武夷) 산맥이라 표기하고 있다. 무이산(武夷山)이란 곧 동이(東夷)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우리 역사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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