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도 비를 실어 나르는 숲에서는 나 자신을 낮춘다.
바람도 비를 실어 나르는 숲에서는 나 자신을 낮춘다.
바람에 끝 달리는 초목들의 아우성 뿐, 새소리도 멎고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다. 그 숲에 눈을 주고 있는 나도 그 바람이며, 바람에 몸 뒤채는 초목이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둘리다 떨어지는 빗방울이다. 인생은 모노드라마며 단식 경기다. 세상을 향해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공격수가 되었다가 수비수가 되곤 하며 엮어가는 자서전이다.
땅과 바다를 떠난 물이 구름으로 하늘에 머물다가 바람의 부추김에 비가 되어 다시 돌아와서 생명을 일군다. 생명을 깨우는 것이라고 모두 다정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한때는 거친 정복자의 모습으로, 더러는 인자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온다.
촉촉이 다가와 온갖 살아 있는 것의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을 북돋으며 꽃 피우고 열매를 영글게 하는 비의 모습도, 온 세상을 삼킬 듯 거칠게 다가들어 산천을 뒤흔들고 인간의 역사조차 무참하게 조롱하는 폭풍우도 남겨진 생명들에게는 구원이며 축복이 된다.
태풍이 뒤집어놓은 바다 속으로 먹이를 찾아 수많은 고기떼가 오는 법이란다. 우리네 인생사의 행, 불행도 모습만 다를 뿐 같다. 우리는 나에 갇혀 사는데 무척이나 익숙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웃과의 관계도 심지어는 구원이라는 절대가치를 추구함에도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의 시각으로만 판단하려는 근시안적 사고에 갇혀 산다.
나와 상대를 구분함으로 정체성을 꾸미고 나와 다름은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면서 불안하다. 내가 부정하며 적대시해오던 것들이 옳게 평가되거나 나보다 강한 모습의 무엇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 조바심을 내곤 한다.
태초 이래 세상에 나온 생명체 중에 아무 것도 사라진 것이 없다. 환경에 따라 조건에 맞추어 진화하며 바뀌어 있을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이유가 있어 존재하고 우주적으로 불필요한 생명체는 없다. 지금 막 경계 음을 내는 저 새도 바람에 몸살을 앓는 나뭇잎도 내 일부이며 바로 나다.
바람에 반응하는 초목들의 아우성이 바람 소리인지 바람에 부대끼는 초목들의 소리인지는 관심을 접겠다. 내가 바람이 되고 초목이 되어 그냥 느끼고 싶을 뿐. 큰스님의 법문처럼 바람은 바람이고 숲은 숲인가? 그조차 관심 없다. 그냥 바람이며 숲을 느끼고만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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