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기에서 배우는 협력이 경쟁 경쟁이 협력 널뛰기 경재원리
널뛰기에서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선 널빤지에서 떨어뜨려야만 한다.
그러자면 상대방이 높이 오르도록 힘껏 굴러줘야 하고 힘껏 구르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리듬과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
결국 널 위에서는 누구나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가 돼야만 하는 것이다.
지식 정보화시대의 기업환경에서는 경쟁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경쟁자를 완전히 괴멸시키거나 나치 전략처럼 씨를 말리는 작전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제품들은 모두가 유기적으로 링크돼 있어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이라도 타 제품과의 호환성이 없으면 폐물이나 다름없다.
협력이 경쟁이 되고 경쟁이 협력이 되는 널뛰기 경쟁원리야말로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가는 출구요, 그 화살표다.
그렇다. 이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경쟁자의 호흡에 맞춰 힘껏 굴러줘야 한다.
그래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 거기 행복한 우리 미래의 마당이 보인다.
이 세상에는 3천이나 되는 많은 민족이 살고 있다.
하지만 널뛰기를 하는 것은 오직 한국인뿐이라고 한다.
가까운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놀이다.
다만 류큐(琉球) 지방에 그와 비슷한 민속놀이로 판무희(板舞戱) 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고려 말에 왕래가 잦던 사상(使商) 들에 의해 한국에서 건너갔을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서양에도 시소란 것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한국의 널뛰기와 비교해 보면 정말 어린애 장난이다.
시소는 걸터 앉아 하지만 널뛰기는 서서 한다.
그래서 시소와는 벗할 수 없는 격렬한 놀이다. 높이 오를 때는 자기 키보다 높게 솟아오른다. 실제로 널뛰기를 하는 사람의 맥박 수는 1분당 1백73~1백74나 된다. 배구나 배드민턴보다도 높은 수치다.
고려 때 여성들은 말타기나 격구(擊毬) 같이 여성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과격한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널뛰기도 역시 고려 때의 그 풍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널뛰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한국 여성들이 여러 스포츠 분야에서 남성들이 해내지 못한 세계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는지 짐작이 간다. 육체만이 아니다.
널뛰기는 그 정신적인 면에서도 적극성을 보여준다. 그것이 옥에 갇힌 남편을 보기 위해 생각해낸 놀이였다는 전설이 그렇다. 다른 죄인의 아내를 꾀어 함께 널뛰기를 하면서 담 너머 깊숙이 갇혀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 전설이 아니더라도 널뛰기가 울 안에만 살아왔던 여인네들이 담 밖의 세상을 구경하고 외간남자의 모습도 엿보기 위해 만들어진 놀이라는 속설도 있다.
분명 널뛰기는 한치라도 더 높이 솟아오르고자 하는 초월의 욕망을 표현한다. 어떤 분수, 어떤 용수철이, 아니면 어떤 발레리나가 저렇게 수직으로 뛰어오를 수 있겠는가. 다홍빛 치마폭이, 꽃 자주 댕기꼬리가 깃발처럼 펄럭이면서 담장 위로 솟아오를 때 우리는 일시에 중력에서 벗어나 하늘로 상승하는 해방의 몸짓과 자유의 율동을 본다.
신내린 무당이 춤추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널뛰기의 널을 널(棺) 이라고 보는 민속학자도 있다. "널은 우리 선조가 하늘나라에 세웠다는 자미원(紫微垣) 의 저승으로 죽은 자의 혼을 보내는 배" 라는 설이다. 이렇게 널뛰기가 무속 의식에서 나왔다는 말을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 카이요와의 분류대로 현기증을 즐기는 일링크스(Ilynx) 에 속하는 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승부를 겨루는 경쟁의 성격을 지닌 아곤(agon) 의 놀이에 속한다는 점이다.. 널뛰기에서 허리 높이까지 뛰면 외방울을 달아주고, 어깨 높이까지 뛰면 쌍방울을 달아준다. 그리고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높이 뛰는 사람에게는 세 방울을 채워준다.
그래서 널뛰기 챔피언이 되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품삯을 주고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했다. 널 잘 뛰는 여자가 씨를 뿌리면 그해 곡식이 잘된다는 속신(俗信) 때문이다. 널뛰기의 힘은 곧 곡식들이 자라 하늘로 솟아오르는 그 성장의 힘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널뛰기가 높이 올라가는 경주이면서도 다른 것과는 달리 경쟁자의 리듬과 호흡에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경기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이 공을 받을 수 없게 서브를 먹이고 볼을 깎아 스매싱을 하는 탁구나 테니스 같은 경기와는 아주 다르다. 널뛰기는 경쟁자를 이기기 위해선 널빤지에서 떨어뜨려야만 한다. 그러자면 상대방이 높이 오르도록 힘껏 굴러줘야 하고 힘껏 구르기 위해서는 상대편의 리듬과 타이밍을 잘 맞춰줘야 한다. 결국 널 위에서는 누구나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가 돼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받는 상대편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구르기 전에 먼저 뛰어오르거나 굴러주는 데도 가만히 있으면 널뛰기는 계속될 수 없다. 힘껏 구르는 경쟁자의 힘을 이용해 높이 솟아야 다음에 자신도 상대방을 힘껏 굴러줄 수 있다.
이래서 모두 함께 높이 오르는 경주를 펼치게 된다. 교대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정반대의 운동을 하면서도 서로의 반동을 이용하고 그 리듬과 균형에 맞춰 너와 내가 한 몸이 될 때 널뛰기의 신바람과 경주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한마디로 널뛰기의 특성은 협력이 경쟁으로 통하고 경쟁이 협력으로 변하는 특이한 승부의 양식에 있다. 허리 끝에 단 상대방의 방울소리를 들으며 서로 균형과 장단을 맞추는 널뛰기의 게임은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는 아름다운 듀엣과도 같다.
균형과 조화를 통한 널뛰기 경주의 특성은 그 놀이의 규칙에서도 나타난다. 마른 사람과 뚱뚱한 사람처럼 신체조건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함께 널뛰기 시합을 할 수 있다.
상대방과 무게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고인 목으로 널빤지의 길이를 조절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밥을 준다 고 한다.
우리는 널뛰기에서 곰이 사람이 되고 다시 그 사람이 하느님의 며느리로 그 신분을 두 단계나 껑충 뛰어오른 우리 할머니 웅녀의 욕망을 본다. 그리고 신장대를 잡은 무당의 도약 같은 신바람의 문화를 느낀다. 그러나 만약 그 널뛰기에 이같은 한국 특유의 경쟁 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욕망과 에너지를 최종적으로 마무리짓는 것은 바로 경쟁과 협력을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그 경주의 신비한 힘이다.
그리고 경쟁-협력의 그 당착이야말로 디지털 시대를 여는 황금의 키워드다. 서양에서는 널뛰기의 경쟁-협력 원리가 이미 네트워크 시대의 기업전략으로 정석화하고 있다.
그것이 요즘 새롭게 등장한 copetition 이라는 경영학의 신조어다. 지금까지 반대말로 쓰인 협력(cooperation) 과 경쟁(competition) 이란 한 단어로 결합된 것다.
지식 정보화시대의 기업환경에서는 경쟁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경쟁자를 완전히 괴멸시키거나 나치 전략처럼 씨를 말리는 작전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윤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렇게 돼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제품들은 모두가 유기적으로 링크돼 있어 아무리 뛰어난 기술력이라도 타 제품과의 호환성이 없으면 폐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디팩토 스탠더드 (실질적 표준) 를 만들지 않으면 자사의 제품을 글로벌화할 수 없다. 소니는 비디오산업에서 경쟁기업을 따돌리기 위해 베타막스의 포맷을 독점 고수했다. 그러나 빅타의 VHS는 여러 경쟁업자에게 셰어해 시장의 표준형이 되도록 협력 전략을 썼다. 결과는 소니의 대패였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산업구조는 한 기업이 모든 것을 개발하고 독점할 수 있도록 돼 있지 않다. 그렇게 경쟁이 심한 미국의 자동차회사 빅3가 같은 홈페이지를 사용해 전세계로부터 부품을 조달받고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어느 경제학자의 말대로 무엇이든지 혼자서 다 하려는 것은 농민적 발상이다. 도시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자기가 생산하고 나머지는 슈퍼에서 다 산다. 분업과 협업의 관계가 일어난다. 국가간에도 식량을 1백% 자급하는 나라는 전쟁의 위험에 빠진다. 주위에서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분업을 해 협력체제로 가면 전쟁은 곤란해진다.
설령 독점할 수 있어도 오늘날의 경쟁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독점금지법의 철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의 경쟁자인 매킨토시와 제휴해 자금을 제공했던 것도 그 철퇴를 피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널뛰기 경쟁원리는 기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미래사회에서는 모든 분야가 이 원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자유와 평등은 세계시스템의 가치가 됐지만 실제로는 물과 기름처럼 모순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경제원리로서 무한 경쟁을 추구하고 평등은 정치원리로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협력을 요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무한경쟁 이라는 말과 더불어 사는 사회 라는 구호가 그야말로 시소게임을 하고있다. 경쟁이 어느 나라보다 심한 일본인데도 초등학교 음악교재에서는 1백년 가까이 불러온 눈에 관한 동요 ( 유키야 꽁꽁 아라레요 꽁꽁 ) 를 삭제해 버린다.
오키나와와 같이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의 아이들에 대한 차별이라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리버럴 휴머니즘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경쟁을 없애기 위해 필기시험의 평가제도 없앴다. 그 바람에 자기의 졸업장도 읽지 못하는 학력 저하자를 배출하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생물의 모든 유전자에는 경쟁에서 이기려는 맹목적인 의지가 각인돼 있다. 그러므로 경쟁심을 없애는 사회보다는 그 경쟁의 방법이나 의식을 고치는 작업이 요구된다. 그것이 우리가 일찍부터 갖고 있었던 널뛰기의 경협원리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병든 경쟁심과 네가 뭔데 네가 별거냐 라는 평등 아닌 무등의식이 오늘의 한국을 늪에 빠뜨리고 있다.
협력이 경쟁이 되고 경쟁이 협력이 되는 널뛰기 경쟁원리야말로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가는 출구요, 그 화살표다. 그렇다. 이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경쟁자의 호흡에 맞춰 힘껏 굴러줘야 한다. 그래서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 거기 행복한 우리 미래의 마당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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