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박진감 넘치는 연기
056 박진감 넘치는 연기
이치가와 사단지 1세가 아직 엔쇼라는 이름을 무대에 오르던 무렵의 일이었다. 사단지는 충신인 엔야 판관을 맡았고, 상대인 고노 모로나오 역은 이치가와 단쥬로 9세였다. 드디어 마츠노 로카에서 칼부림이 벌어지는 장면이었다.
"네 이놈 모로나오! 내 칼을 받아라."
판관으로 분장한 사단지가 이렇게 외치며 재빨리 내리쳤는데, 모로나오로 분장한 단쥬로가 도망치면서 관객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렇게 맥없이 내려치면 어떻게 해?"
사단지는 화가 치밀어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있는 힘을 다해서 내려쳤지만 단쥬로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빈정거렸다.
"도저히 어쩔 수 없군. 그렇게 맥이 없어서야....."
마치 연기가 서투른 배우 취급을 하는 바람에 사단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 빌어먹을 놈. 사람 업신여기는 것도 분수가 있지. 두고 봐라. 내일은 그 우쭐거리는 면상을 정말로 묵사발내 줄 테다."
사단지는 단단히 마음먹고 노기등등해서 무대로 올라갔다. 드디어 그 장면이 되었다.
"네 이놈 모로나오, 내 칼을 받아라!"
사단지는 외치자마자 연극을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분노에 불타 진자 베려고 달려들었다.
"앗!"
단쥬로는 놀라서 홱 비켜섰다. 그러나 관객들이 보기에 둘 사이의 호흡이 기가 막히게 맞아서 우렁찬 갈채가 터져나왔다. 나중에 사단지가 그때의 기분을 이야기하자 단쥬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게 해야 뛰어난 배우가 될 수 있는 걸세, 앞으로도 항상 그런 마음으로 연기를 하게나."
단쥬로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연극이기 때문에 진짜로 베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진짜로 베어서는 안 된다는 데 구애받으면 아무리 날쌔게 달려들어도 베는 흉내밖에는 안 된다. 이미 마음에 제어 장치가 있는 한 실감나는 연기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베는 흉내만 낸다면 상대가 칼을 피해 내는 동작도 실감이 나지 않고 느슨할 테니 당연히 김빠진 연기가 된다. 연극은 현실을 허구적으로 재현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허구적인 진실은 허구를 초월한 때 박진감 있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허구를 초월한다는 것은 마음의 제어장치에 전혀 구애받지 안고 자칫 실수하면 진짜 벨 수도 있다는 기백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을 말하다. 이쪽에서 그런 기세로 달려든다면 상태 역시 다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비켜서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베는 자와 피하는 자의 호흡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아떨어지며, 이때 관객들은 탄성을 지르며 갈채를 터뜨리게 된다.
연극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연기자의 호흡을 각자의 업무를 추진할 때 적용하도록 애써야 한다. 서비스 하나만 해도 그렇다. 그저 서비스하는 척만 하는 어설픈 흉내로는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역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
한가지 더, 사단지를 가혹할 만큼 꾸짖던 단쥬로의 마음을 잘 새기기 바란다. 단쥬로가 사단지의 매서운 칼질에 화를 내기는커녕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는 것은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선배가 진심으로 해 주는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한 자세를 지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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