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75)
Buddhism 佛敎 (146)
꿈 소망 사랑 희망 놀이터 (0)
문화공동체 유자의세움 (0)
-------------------- (0)
평강이 (169)
좋은 글귀 (588)
고사성어 이야기 (165)
시행관련 (198)
사업계획서 (34)
컴 배우기 (180)
참고사항 (191)
맛집알고 여행하기 (164)
문서 서식 (74)
임시보관함 (103)
기본카테고리 (176)
가요방 (146)
팝송방 (261)
옛 노래 (153)
뮤직비디오 (190)
보민앨범 (0)
아하 그렇구나 (334)
건축관련 (101)
토목관련 (70)
새로운 카테고리 (122)
물리와화학 (55)
자갈치알리미 (76)
인생이란 (82)
장기표의 시사논평 (371)
한번 배워볼까요 (110)
스크랩 (21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5.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공지사항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내 맘에 들지 않는다 하여 그 사람을 버릴 수는 없다.

『도덕경(道德經)』제62장

道者,萬物之奧。
도자,만물지오。

도(道, Tao)라는 것은 온갖 것의 가장 깊숙한 바탕이다.

道를 무엇이라고 볼까? 그냥 인적이 없던 산에 나물캐러 갔다리 왔다리 하는 人爲의 터치가 쌓여서 생긴 길인가? 아니면 이렇게 가시(可視)적인 것만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는 도드라지지 않지만 만물의 뒤에서 숨어서 기능하는 그것을 떠나서는 도무지 어떤 색깔도 입힐 수 없는 근본 바탕인가? 나는 어떻게 보는가? 생명이면 누구나 기본으로 깔고 올라서 있는 맨틀층같은 근원적 생명 운영원리로 보았으면 한다. 이 도를 떠나서는 모두지 생명이라는 것을 논할 수 없는 그 바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자(道者)는 문법적으로 What is called Tao 라는 주부를 구성하고 이어지는 술부로 설명되고 있다.

도에 대한 노자 할아방의 정의가 내려지고 있다. 노자가 늘 그랬듯이 도는 흐릿흐릿한 규정할 수 없는 A이다. 아니 A 이면서도 not A 이다. 아니 A like B 이다. 이러한 상충(相衝)적으로 보이면서도 모순되지 않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도이다. 노자만의 독특한 규정 방법이다. 萬物之奧. 만물에서 만(萬)은 온갖(All)으로 많은 것을 대칭하고 있는 수사(數詞)이고 물(物)은 그냥 무기물이 아니라 생명과 무생명, 유기물과 무기물을 총괄한 ‘한 생명’으로 보면 된다. 온갖 것이란 말로 옮겼다.

생명을 나는 생명과 무생명, 유기질과 무기질의 차별적 경계를 벗어난 것으로 본다. 모든 것이 생명이다. 죽은 해골 바가지도 생기가 있는 생명과 똑 같다. 이 세계 자체가 거대한 한 생명체라는 인식에서 모든 논의를 출발시키고자 한다. 이 글의 끝에 전재한 관응 대선사의 법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오(奧)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아랫 목. 속. 오지(奧地)라는 말에서와 같이 깊숙한 안쪽. 이런 뉘앙스가 풍기는 단어이다. 오묘(奧妙)하다는 말에서와 같이 규정할 수 없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나는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도라는 것은 온갖 것의 가장 깊숙한 바탕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

善人之寶。
선인지보。

착한 사람(善人)은 이 도를 잘 닦아 드러나 보배롭게 된 것이요.

선인(善人)은 A few good men(women). 노자의 시각은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두가 상대적인 시각이다. 선인(善人)의 대(對)는 불선인(不善人)이다. 그러나 꼭 선하지 못한 사람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 때의 건강한 상황을 유지시키는 기능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善)하기도 하고 불선(不善)하기도 할 뿐이다.

바이러스학자(Virologist) 의 시각에는 좋은 바이러스 나쁜 바이러스의 절대적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어떤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더 많고 적고 할 뿐이며 관계 기능(Relational Functioning)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상대적으로 어떤 개체의 건강성(Homeostasis)을 유지케 하는데 기능하지 않는 배타적 바이러스는 없다. 좋은 바이러스가 기여해 건강성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 않은 바이러스와의 대자적 관계에서 건강성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나쁜 것이 없는 좋은 것은 없다. 좋은 바이러스가 다른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나쁜 바이러스가 될 수도 있다. 좋고 나쁨에 대한 상대적 시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모름지기 보통 인간의 지나친 상대적 편가르기를 경계한다.

不善人之所保。
불선인지소보。

이 도는 착하지 않은 이도 드러나지 않을뿐 지니고는 있는 바다.

김천 직지사 조실로 계신 관응(觀應) 대선사(大禪師)께서 하신 말씀을 읽어보면 요해가 쉽게 될 것이다.

?물은 본래 티 없는 청정한 맹물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물에 커피가루를 타면 커피가 되는 것이고, 된장이나 국거리를 넣어 끓이면 국이 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몸 속에 들어가거나, 땅 속에 들어가 정화되면 본래의 성질인 맹물로 되돌아 옵니다.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이 식 때문에 안으로는 육근(六根)이 생기고, 밖으로는 육진(六嗔)이 생겨서 18계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육감으로 보는 것은 모두 가짜이며 허상입니다. 물이 본래 한가지인 것처럼 생명의 실상도 하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것 등이 ?나?라는 명제를 세우고 자꾸만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다 라는 진리를 터득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밥과 국과 반찬이 위에서 동화됨으로써 소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모두가 자기에게도 와서 하나로 동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에 몰두하다보면 우주 법칙의 기운이 하나로 체화되는 묘력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무심 속에서 ?나?라고 하는 강한 아상이 사그라지면 자유자재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불교』불기 2545년 5월 1일 317호【가까이서 뵌 큰스님】
http://www.buddhapia.co.kr/mem/hyundae/auto/newspaper/317/s-2.htm 에서 인용)

所保는 ‘지니고 있는 바’이다는 말이다. 엄청난 말이다. 바로 모든 사람이 부처의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과 같다. 도는 선인이나 불선인이나 모두 다 가지고 있으나 드러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가지고 있으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美言可以市。
미언가이시。

아름답다고 여기는 말은 저자거리에서 그 뜻을 얻어갈 뿐이며

미(美)는 곧 추(醜)함에 다름아니다. 당대의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말(美言)은 시장(市)에 돌아다닐 만한(可以) 말에 불과하다. 市는 for sale이 가장 많는 번역이 아닌가 한다. 팔리는 제품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얻는 제품이고 시변(時變)하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

尊行可以加人。
준행가이가인。

높이 받들려 지는 행실은 여러 사람들이 자기 몸에 붙여가려 애쓴다.

尊行은 존행이 아니라 준행으로 읽어야 한다. respected behaviors. 모범이 되는 행동으로 정답으로 여겨지는 행위이다. 그 사회의 내력과 주어진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다르게 내려지는 행실이다. 한 예로 풍장(風葬)을 하는 티벳에서는 어떤 사람을 매장(埋葬)한다면 이는 내생에 환생하지 말라는 악의에찬 행위로 여겨지는데 우리 나라는 선행(善行)의 미풍양속으로 받아들여 진다. 전혀 반대이다. 그래서 준행은 가인(可人) 즉 사람을 자꾸 그 방향으로 끌어 모을만 하다(可以, can be, 여기서 can은 가능의 의미)고 노자는 말한다. 그러나 준행은 그 때의 상황에 따라 규정될 뿐이지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다.

人之不善,何棄之有?

어떤 사람에게 착하지 못한 면이 도드라진다 하여, 어찌 그 사람 자신을 버릴 수 있으리오?

人之不善에서 人은 a certain man이다. 내가 아닌 타인이다. 그 사람의 불선(不善)을 느낀 사람의 대응은? 노자 할아방은 이렇게 하라고 한다. 그 사람(之)을 버림(棄, discard)이 있어서는(有) 되겠느냐(何)? 사람에게 있는 선과 불선 자체가 개념적이고 상대적인 규정이며 시대적 상황의 반영이다. 이런 현상이 부각된다 하여 그 사람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노자는 충고한다.

이어서 노자는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오르고 또 오르는 인간의 유위(有爲)문명의 금자탑에 선 이들에 대한 가소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故立天子,置三公。
고립천자,치삼공。

그러므로 하늘 아래 제 일인자인 천자(天子)를 세우고 그를 보좌하는 스탭인 삼공(三公)을 두어

천자와 삼공이란 지위는 명리(名利)가 지극한 최고위급이다. 명예와 실리가 높고 남을 지배하는 지위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는 안락한 생활을 하는 지위에 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자가 누리는 생활을 다음에 말하고 있다.

雖有拱壁以先駟馬,
수유공벽이선사마,

비록 휘황찬란한 옥을 몸에 칭칭감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앞세워 위세를 떨친다 하더라도

수(雖)는 비록 ...하더라도(although...)의 뜻이다. 공(拱)은 두손을 맞잡다, 껴안다는 뜻이다. 벽(璧)은 둥근 옥이며 아름다운 치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벽(拱壁)은 빛나는 옥장식을 잔뜩 몸에 껴안듯이 많이 두른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다. 이렇게 하고서(以) 사마(駟馬) 즉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앞세워(先) 위풍당당 나아감이 있다(有) 하더라도 의 뜻으로 풀어보자. 세인들이 좋다고 선망하는 가치들을 잔뜩 가지고 폼잡아 본들... 전대가리나 물태우가 리무진타고 폼잡고 사이드카의 요란스런 지원을 받으며 행차해 본들...

不如坐進此道。
불여좌진차도。

돌아다니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수행하여 이 도(생명의 본 바탕이 되는 근원적 운영원리)를 깨쳐 나아감만 못하다.

불여(不如)는 ...하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 좌(坐)는 좌석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석(mat)에 앉는다는 말이다. 분답게 돌아다니지 않고 앉아서 용맹정진하는 스님을 연상하면 되겠다. 진차도(進此道)는 이(此) 도에 나아간다는 말이다. 만물이 다 한 생명이며 만사의 가치는 다 상대적이라는 깨침을 하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老莊주의적 세계관의 표명이다.

古之所以貴此道者, 何?
고지소이귀차도자, 하?

옛 사람들은 이러한 도란 놈을 귀하게 여겨 떡하니 버티던 바가 있었다. 그 삶이 어떠하였더냐?

고(古)는 옛을 뭉뚱그린 말로 과거의 그 모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고인(古人)이라는 인간중심의 휴매니스틱 어프로치로 풀었다.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도 없다. 물활론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앞에서 쭉 이야기한 한생명론으로 받아들이자. 之는 주격의 ‘s로 보면 되겠다. 소(所)는 생명이 자리잡고 있는 자리를 말한다. 이(以)는 by way of 로 ...에 의지해서의 뜻이다. 귀차도자(貴此道者)는 이 도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이 도가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말했다. Please be a slow page turner! 노자의 마인드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하려 들지 말아라 이다. 자꾸 언어반야에 의존하고 구업을 지어서는 안되겠다. 하(何)? What about that? 으로 보았다. 이렇게 외자로 분리해서 해석해 낸 것은 철저하게 나뿐이다. 이러니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

不曰,以求得,有罪以免邪?
불왈,이구득,유죄이면사?

이러한 도를 구득(求得)하면, 행동이 어쩌다 인간의 시시비비의 유죄(有罪)에 처해도 “사”(邪, 치우치다)라는 판정은 면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더냐?

불왈(不曰)은 수사적 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이다. 그래서 ...라고 말하지 않았더냐는 뜻으로 풀었다. 이구득(以求得)은 이 도를 구하여 얻음이 가능해짐으로써의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유죄(有罪)로 판정 받아도 그것이 결국은 사(邪)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免)받음으로(以) 유죄가 한정된다 말이다. 세인들의 시비곡직의 자로 판정 받을 수는 있지만 도를 통달한 자가 어느 한편에 치우쳐 생긴 것이라는 판정은 받지 아닌한다. 한 생명으로 살면서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은 죽이고 어느 것은 살리고 가 아니라 한 생명 자체를 통짜배기로 살리는 길에서 걸어갔기 때문이다.

故爲天下貴。
고위천하귀。

그러므로 이 도의 운영원리에 따라 행동함이 이 천지(tien-ti cosmology)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고(故)는 그러므로의 뜻이다. 위천하귀(爲天下貴)는 천하에서(於天下) 귀한 것이 바로 이러한 도의 참된 실상이며 이를 깨쳐 알고 행하는 것이다.


아래에 『현대불교』317호(불기 2545년 5월 1일)에 난 기사를 전재(全載)한다.
【가까이서 뵌 큰스님】관응스님(직지사 조실)

'좋은 글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뺄 것인가? 더할 것인가?  (0) 2006.05.04
마음의 눈 뜨면 모두 부처님  (0) 2006.05.03
손해보며 살아라  (0) 2006.05.02
내 몸의 주인으로 살자  (0) 2006.05.01
역량이 부족할수록 이렇게 살자  (0) 2006.04.30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