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난초는 미인과 같아서 ,,매란국죽(梅蘭菊竹)
좋은 글귀 / 2012. 2. 11. 02:02
난초야, 미안해
1월이 끝나갈 무렵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던 날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가볍게 스쳤습니다. 처음엔 무슨 냄새인가 하는 호기심도 없었습니다. 조금 후 또 한 차례 같은 향기가 코끝을 휘어 감았을 때에야 “혹시 난초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른 벽면 가스난로 밑에 방치하다시피 했던 난 화분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여남은 개의 잎줄기 사이로 꽃대궁이 살며시 솟아올라 꽃봉오리를 피웠습니다. 약간 황색을 띤 꽃봉오리는 꽃받침 속에 숨어서 오히려 야생화처럼 수수한 척 했습니다. 다가가 화분 가까이에 얼굴을 댔더니 진한 난향이 코끝을 찔렀습니다.
살짝 마음이 켕겼습니다. 난초에게 미안한 생각으로.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그 난초를 난초답게 대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학대한 셈입니다.
작년 초봄 사무실이 생긴 것을 기념하여 친지 몇 분이 난 화분을 보내왔습니다. 꽃이 활짝 핀 양난 화분은 놓고 보다가 꽃이 시들자 치워버렸고, 잎줄기가 가는 난 화분 하나는 치워버리기도 뭣해서 그냥 방 한구석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군자의 하나인 난은 선비의 기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사실 나는 난에 대한 남다른 지식도 없고 각별한 관심도 없습니다. 승진과 사무실 이전에 보내는 난 화분, 고스톱에서 별로 알짜가 없는 화투의 난초, 대원군의 난 그림과 가짜에 얽힌 얘기, 어릴 때 풍란을 캐러 절벽을 오르던 추억, 양난 재배하다 손해 본 친구 얘기 등이 난에 대한 내 정보요 지식의 전부입니다. 사실 동양란과 양란을 구별할 줄도 모르니 내 사무실에 놓인 난이 어떤 종류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심 정도이니 난 화분을 가꾸기는 고사하고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몇 번 물을 준 흔적을 보았으나, 내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눈치 챘는지 그 아주머니도 관심이 뜸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난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습니다. 물 한 방울 줄 생각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어느 날 우연찮게 난 화분으로 시선이 옮겨졌는데 잎사귀가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어이쿠, 그냥 두면 죽겠다.’ 싶어 마시다 컵에 반쯤 남은 물을 주었습니다.
여인의 허리처럼 잘록하고 호리호리한 난 화분은 흙이라기보다 자잘한 돌 부스러기 몇 줌 정도로 채워져서 수분을 가둘 수가 없었던지 물은 화분 밑바닥 숨구멍에서 곧 새어나왔습니다.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며칠에 한 번 화분을 화장실 등에 옮겨 놓고 물세례를 퍼붓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그럴 만큼 난에 관심이 없었으니 마시다 남은 물로 그 난은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 후 물을 주지 않으면 난이 죽을지 모른다는 잠재적 심리가 발동했는지 한 달에 한번 정도 어쩌다 생각나면 컵에 담고 마시다 남은 물을 주었습니다. 분갈이도 안 했고, 난화분에 거름을 주어야 하는 건지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12월이 되면서 또 난초의 존재를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겨울에 찾아온 난향은 소리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무시당한 난은 아름다운 향기로 내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나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입니다. 사죄의 마음이 발동한 걸까. 나도 모르게 컵을 들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가득 받아다 난 잎 위에 부었습니다. 난이 나에게서 처음으로 물 한 컵을 온전히 받아먹은 것입니다. 난은 물을 가두지 않고 화분 밑 숨구멍으로 거의 모두 내려 보냈습니다. 물 냄새만 맡는 걸로 만족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언제 내가 많은 물을 달라고 그러더냐.”라고 중얼거리는 게 분명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난은 나에게서 물을 받아먹었다는 반응을 보내왔습니다. 이삼일 후 난 화분에는 또 하나의 꽃대궁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잎사귀들 사이에 숨어서 세상을 살피는 것 같은 수줍은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노래하고 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의 시 중에 난을 소재로 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봄의 난초는 미인과 같아서
캐지 않으면 스스로 바치길 부끄러워하지
바람에 건듯 향기를 풍기긴 하지만
쑥대가 깊어 보이지 않는다네
(春蘭如美人 不採差自獻 時聞風露香 蓬艾深不見)
옛날에 한 번 접한 것 같은데 그때는 추상적으로 멋있는 구절이구나 하는 정도였지 만 이제야 그 구절의 맛을 구체적으로 본 것 같았습니다. 난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니 옛 시인의 깊은 음유를 공감할 수가 없었을 수밖에요.
과학적으로 보면 식물은 적당한 물만 있으면 다른 필요한 영양분 95퍼센트를 공기에서 흡수하며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느닷없는 난향의 공습을 받고서 옛 문인들의 시정(詩情) 못지않게 다른 무엇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입니다. 돌 부스러기 한 줌 속에서 자라고 꽃봉오리를 맺는 난초에서 생명의 색깔을 보고,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 어떤 시보다, 그 어떤 그림보다, 그 어떤 불후의 명작보다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하나의 생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월이 끝나갈 무렵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던 날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가볍게 스쳤습니다. 처음엔 무슨 냄새인가 하는 호기심도 없었습니다. 조금 후 또 한 차례 같은 향기가 코끝을 휘어 감았을 때에야 “혹시 난초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른 벽면 가스난로 밑에 방치하다시피 했던 난 화분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여남은 개의 잎줄기 사이로 꽃대궁이 살며시 솟아올라 꽃봉오리를 피웠습니다. 약간 황색을 띤 꽃봉오리는 꽃받침 속에 숨어서 오히려 야생화처럼 수수한 척 했습니다. 다가가 화분 가까이에 얼굴을 댔더니 진한 난향이 코끝을 찔렀습니다.
살짝 마음이 켕겼습니다. 난초에게 미안한 생각으로.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그 난초를 난초답게 대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학대한 셈입니다.
작년 초봄 사무실이 생긴 것을 기념하여 친지 몇 분이 난 화분을 보내왔습니다. 꽃이 활짝 핀 양난 화분은 놓고 보다가 꽃이 시들자 치워버렸고, 잎줄기가 가는 난 화분 하나는 치워버리기도 뭣해서 그냥 방 한구석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사군자의 하나인 난은 선비의 기품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사실 나는 난에 대한 남다른 지식도 없고 각별한 관심도 없습니다. 승진과 사무실 이전에 보내는 난 화분, 고스톱에서 별로 알짜가 없는 화투의 난초, 대원군의 난 그림과 가짜에 얽힌 얘기, 어릴 때 풍란을 캐러 절벽을 오르던 추억, 양난 재배하다 손해 본 친구 얘기 등이 난에 대한 내 정보요 지식의 전부입니다. 사실 동양란과 양란을 구별할 줄도 모르니 내 사무실에 놓인 난이 어떤 종류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관심 정도이니 난 화분을 가꾸기는 고사하고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몇 번 물을 준 흔적을 보았으나, 내가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을 눈치 챘는지 그 아주머니도 관심이 뜸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난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습니다. 물 한 방울 줄 생각도 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뜨거운 어느 날 우연찮게 난 화분으로 시선이 옮겨졌는데 잎사귀가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어이쿠, 그냥 두면 죽겠다.’ 싶어 마시다 컵에 반쯤 남은 물을 주었습니다.
여인의 허리처럼 잘록하고 호리호리한 난 화분은 흙이라기보다 자잘한 돌 부스러기 몇 줌 정도로 채워져서 수분을 가둘 수가 없었던지 물은 화분 밑바닥 숨구멍에서 곧 새어나왔습니다. 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며칠에 한 번 화분을 화장실 등에 옮겨 놓고 물세례를 퍼붓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그럴 만큼 난에 관심이 없었으니 마시다 남은 물로 그 난은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 후 물을 주지 않으면 난이 죽을지 모른다는 잠재적 심리가 발동했는지 한 달에 한번 정도 어쩌다 생각나면 컵에 담고 마시다 남은 물을 주었습니다. 분갈이도 안 했고, 난화분에 거름을 주어야 하는 건지 그냥 두어야 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12월이 되면서 또 난초의 존재를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겨울에 찾아온 난향은 소리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존재의 가치를 무시당한 난은 아름다운 향기로 내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나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입니다. 사죄의 마음이 발동한 걸까. 나도 모르게 컵을 들고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가득 받아다 난 잎 위에 부었습니다. 난이 나에게서 처음으로 물 한 컵을 온전히 받아먹은 것입니다. 난은 물을 가두지 않고 화분 밑 숨구멍으로 거의 모두 내려 보냈습니다. 물 냄새만 맡는 걸로 만족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언제 내가 많은 물을 달라고 그러더냐.”라고 중얼거리는 게 분명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난은 나에게서 물을 받아먹었다는 반응을 보내왔습니다. 이삼일 후 난 화분에는 또 하나의 꽃대궁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잎사귀들 사이에 숨어서 세상을 살피는 것 같은 수줍은 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노래하고 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의 시 중에 난을 소재로 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봄의 난초는 미인과 같아서
캐지 않으면 스스로 바치길 부끄러워하지
바람에 건듯 향기를 풍기긴 하지만
쑥대가 깊어 보이지 않는다네
(春蘭如美人 不採差自獻 時聞風露香 蓬艾深不見)
옛날에 한 번 접한 것 같은데 그때는 추상적으로 멋있는 구절이구나 하는 정도였지 만 이제야 그 구절의 맛을 구체적으로 본 것 같았습니다. 난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니 옛 시인의 깊은 음유를 공감할 수가 없었을 수밖에요.
과학적으로 보면 식물은 적당한 물만 있으면 다른 필요한 영양분 95퍼센트를 공기에서 흡수하며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 느닷없는 난향의 공습을 받고서 옛 문인들의 시정(詩情) 못지않게 다른 무엇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입니다. 돌 부스러기 한 줌 속에서 자라고 꽃봉오리를 맺는 난초에서 생명의 색깔을 보고,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 어떤 시보다, 그 어떤 그림보다, 그 어떤 불후의 명작보다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하나의 생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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