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75)
Buddhism 佛敎 (146)
꿈 소망 사랑 희망 놀이터 (0)
문화공동체 유자의세움 (0)
-------------------- (0)
평강이 (169)
좋은 글귀 (588)
고사성어 이야기 (165)
시행관련 (198)
사업계획서 (34)
컴 배우기 (180)
참고사항 (191)
맛집알고 여행하기 (164)
문서 서식 (74)
임시보관함 (103)
기본카테고리 (176)
가요방 (146)
팝송방 (261)
옛 노래 (153)
뮤직비디오 (190)
보민앨범 (0)
아하 그렇구나 (334)
건축관련 (101)
토목관련 (70)
새로운 카테고리 (122)
물리와화학 (55)
자갈치알리미 (76)
인생이란 (82)
장기표의 시사논평 (371)
한번 배워볼까요 (110)
스크랩 (215)
Total
Today
Yesterday

달력

« » 2025.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공지사항

태그목록

최근에 올라온 글

입을 작게 줄이고 귀를 크게 열자

금 장 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조선시대를 이끌어갔던 지성인으로서 선비의 이념은 ‘의리’(義理)였다. ‘의리’는 불의에 타협하거나 굽히지 않는 엄중한 비판의식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 우리시대의 용어로는 ‘정의’라 할 수 있다.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리는 확고한 가치판단을 지켜간다면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양심과 상식이 있으니 건전한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옳은 것을 보면 옳다하고 그른 것을 보면 그르다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비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지자 서로 자신이 옳고 상대편이 그르다는 주장이 맞서게 되어 시비의 판별이 어지러워지게 되는데서 발생하였다. 자신은 진리요 상대방은 허위이며, 자신은 ‘군자’요 상대방은 ‘소인’이라고 맞붙어 싸우게 되면 누가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해준단 말인가. 어쩌면 다수의 대중이 판단해준다는 ‘공론’(公論)이나 ‘여론’을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들이 이쪽 편에 서거나 저쪽 편에 서서 갈라지면, ‘공론’이라는 것도 믿을게 못된다. 어느 쪽 목소리가 큰지, 어느 쪽 기세가 거센지에 따라 이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저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니, ‘의리’라는 것도 구호에 불과하고 ‘공론’도 세력에 불과하다. 요즈음 거리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떼 지어 다니거나 촛불을 들고 떼 지어 모여들어 모두가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광경과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붕당은 달라진게 없는 듯

선비들 사이에 신념을 달리하면서 무리를 지어 붕당(朋黨)이 이루어지고, 서로 대립하여 당쟁(黨爭)을 한 번 시작하자, 잠깐 사이에 온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넷으로 갈라지며 끝없이 분열과 갈등을 계속하였다. 당파마다 제각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정당한 명분을 내걸고 있으니, 상대방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도륙을 당하는 참혹한 현실에서도 ‘죽일 놈’은 왜적에 앞서 먼저 상대편 당파를 지목하여 목청을 높였다.

국경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했던 선조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지었던 시에서,

“의주땅 물가에서 달을 보며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도 가슴을 앓는구나/ 조정 신하들이여, 오늘의 처지를 겪고서도/ 또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려드느냐”라고 읊었다. 인조임금은 이 시를 읊조리며, “그렇다. 병란(兵亂)이야 언젠가 멎을 때가 있겠지만, 붕당은 멎을 기약이 없으니, 그 피해가 수재나 병란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라 탄식하였다 한다. 자신의 당파만이 진실하고 정당하고 선하다는 확신으로 당파적 신념에 목숨을 걸고 있는 인물들에게는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당론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당쟁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율곡은 서로 비난만 일삼는 동인과 서인의 양쪽을 화합시키기 위해 양쪽 모두 옳은 점도 있고 양쪽 모두 그른 점도 있다고 지적하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제시하여, 당쟁의 양쪽 주장을 조정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쪽 편으로부터 동시에 의심과 비난만 받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왜 당쟁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하고 해소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원인을 돌아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지만 그 속의 실상은 세력과 이권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감추고 있다. 말하자면 밥그릇을 제가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예법과 의리를 내세워 상대방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자기 신앙만 진리라고 주장하거나 자기 견해만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독선적 개인과 집단은 모두 당파적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당파적 심리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한다는 상극(相克)의 논리요 함께 어울려 살자는 상생(相生)의 논리가 아니다.

문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떠오른다

현대인은 물질적 욕심만 가득하고 정신적 사유는 빈곤하다 하여 배는 크고 머리는 작은 기형아로 그려내기도 한다. 당파적 대립에 빠진 인간들은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의 견해는 이해하려들지 않으니 입만 크고 귀는 없는 기형아로 그려낼 만 하다. 그렇다면 당쟁을 해소하는 길은 자기주장의 목청을 낮추어 입을 작게 줄이고 남의 주장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귀를 뚫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말을 잘하는 달변(達辯)을 미덕으로 높일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 이순(耳順)을 진정한 미덕으로 높이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을 시켜야 하고, 사회적으로 확신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 같다. 입장을 바꾸어 남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너무 부족하여 당쟁의 혹심한 폐단을 일으켰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일방적 주장의 투쟁구호만 요란하고 상호이해의 대화는 결핍되어 사회적 통합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기주장의 목청을 낮추고 상대방을 향해 귀를 크게 열기만 한다면, 정당의 극단적 대결이나 노사의 갈등도 풀리고, 남북의 대립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니전투구(泥田鬪狗)의 진흙탕에서 벗어나 툭터지고 평탄한 대로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입을 작게 줄이고 귀를 크게 여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 |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