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에게
날이 새고 있네. 비 소식이 있어서인지, 세상이 무겁게 열리고 있어.
가볍게 이는 바람에 가녀린 이파리가 하늘거리고 산새들의 목청도 조심스럽기만 하네.
참으로 오랜만이네. 그동안 무심했던 나를 용서하시게나.
오늘이른 새벽에 깨어누군가의 글을 읽다가 우체통이라는 단어를 발견했고, 한 시절 친숙했던 '귀하와 에게'라는 실종된 언어를 떠올린 게야. 편지지를 펼쳐놓고 그리움의 인사를전할 때,꼭꼭 눌러 첫머리에 얹어 넣던 언어들. 이제는 먼지 덮인 국어사전 속에서나 멈춰 있고, 간혹 대중가요 제목으로 감동 없이 등장하는 박제된 그 언어들 말일세.
지금 나도 현대화된 방식으로 붓 대신 자판을 톡톡 두드리며 그대의 안부를 묻고 있지만, 붓이나 연필을 쥐는 기분을 이끌어내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네.
벗이여. 세상은 숨막히게 우리를 재촉하고, 우리는 그 속도에 이끌리며 이 나이가 되었네. 잠시 머뭇거리면 이웃은 저만치 앞서 가 있고, 그들과 호흡을 함께 하려 허둥대다 보니 이룬 것도 없이 나이테만 보탠 셈이야. 그래, 어떻게 지내시는가. 인중 주변 솜털이 제법 거뭇하게 자리할 사춘기 무렵 헤어졌으나 이젠 매일 깎아내던 그 수염마저 하얗게 센 가닥이 삐죽대는 초보 영감이 다 되었네그려. 무탈하시겠지.
이 편지가 그대에게 당도하리라는 기대는 않겠네. 그러나 혹 아는가? 이심전심으로 내 그리움이 그대에게 닿아 우연히 전달될 지를. 지금 내가 자판을 두드리듯 자네도 시류를 따라 이곳을 기웃거리고 있을 지도 모를일이지.
까까머리 학창시절을 끝으로 우리 인연이 멎어있다 하더라도결코 서운함은 없네. 수십 년의 세월 저 편에 멈춰선그대에 대한 그리움으로 편지 한 통 쓰라 이끄는것. 이 어찌 사소한 인연이겠는가?
부디 건강하시게나. 사노라면거대한 우주의 손길에 이끌려 조우할 일도 있으리니. 그때 소줏잔이라도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세상 참 상큼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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