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아래서 만물은 최고의 모습으로 빛나
옅은 구름을 뚫고 내리는 햇살이
절간 담장에 대나무 그림자를 누입니다.
그림자 사이로 봄꽃처럼 고이는 햇살 한 줌.
법당안으로는 적당히 구부러진
커다란소나무가
옅은 햇살을 머리에 이고 있습니다.
바늘잎이 햇살을 잘게 부수고 있었습니다.
범어사를 오릅니다.
햇살은 수억 년을 살아도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답니다.
숲 저편에서
딱따구리가 소나무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햇살을 쪼는 소리입니다.
까치와 멧비둘기가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길동무를 해 줍니다.
천천히 아껴 걷습니다.
정문을 지날 무렵
햇살이 솔숲으로 길게 다리를 뻗습니다.
숲속 깊숙이로 들어서는 햇살은
소나무의 붉은 몸통에 제 얼굴을 비춰봅니다.
또 한 꽃이 피어오릅니다.
늘 푸른 소나무 잎이 머쓱해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독야청청(獨也靑靑)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박한 인간 세상에서 드물게 만나는
지조와 절개를 빗댄 뜻을 모르는 바 아니나,
뿌리 깊은
인간 중심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불편합니다.
대웅전에서 햇살을 등에 업고 안으로 내려섰습니다.
저마다 햇살 아래 양명합니다.
햇살 아래서 만물은 저마다 최고의 모습으로 빛납니다.
본디 세상은 커다란 꽃이라 했던가요.
그러나 우리는 늘 특별한 꽃을 찾아 헤맵니다.
아니 ‘잠그려’ 합니다.
누가 춤을 잠근다
피어나는 꽃을 잠그고
바람을 잠그고
흐르는 물을 잠근다
저 의구한 산천을
새소리를 잠그고
사자와 호랑이를 잠근다
날개를 잠그고
숲을 잠근다
숨을 잠그면?
꽃을 잠그면?
춤을 잠그고
노래를 잠그면?
그러나 잠그는 이에게
자연도 웃음짓지 않고
운명도 미소하지 않으니, 오
누가 그걸 잠글 수 있으리오
― 정현종, ‘꽃을 잠그면?’ 전문
햇살 고운 계절입니다.
봄입니다.
어느 주말 범어사에 올랐습니다.
봄기운을 한껏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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