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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意事必成 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 뜻을 품고 있으면 이룰수있다 010-7641-1981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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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글

좋은 글귀 / 2011. 11. 22. 10:14
눈물 젖은 글

자정을 30분이나 넘긴 지금, 일터에서 돌아오자마자 입었던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려 널고 물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지금부터 글을 써야 하지만 밥 먹을 틈도 없이 온종일 ‘뺑이’를 친 후라 실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일하며 배우는 야간학교 학생들도 이 시각이면 수업이 끝날 터이니 그네들에 비해도 저의 처지는 별반 나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수동적인 수업과 달리 아무리 피곤해도 글 쓰며 졸 수는 없는 일이니 흘러내리는 눈꺼풀을 이쑤씨개로 받칠 필요는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더니 오너는 집에서도 쉬지 못하는 법이라 남편이 자영업을 시작한 이후 아침부터 자정 무렵까지 가게에 있는 시간 말고도 머릿속은 온통 일로 채워져 있습니다. 통으로 하루를 비워 글을 쓴다거나 글 쓰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던 때와는 상황이 사뭇 달라진 요즘, 녹록찮은 현실에 이대로 녹아버린다면 그나마 짧은 글쓰기마저 포기하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종종 느낍니다.

하지만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에 치여 부단히 지치고 조금치도 여유가 없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 뿐이겠습니까. 남들은 진즉부터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이제 막 그 대열에 합류해 놓곤 혼자 죽는소리 한다고 흉 들을까 부끄럽지만, 저로서는 삶이라는 거대한 물살에 휩쓸려 그대로 떠내려 갈 것이냐, 아니면 미미하기 짝이 없다 해도 거부와 저항의 몸짓을 지속할 것이냐의 ‘실존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나 다른 창의적, 예술적 작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말고 일반 생업 수단을 가진 사람이 순간을 여투고 티끌을 모아 자신의 세계를 오롯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하기조차 한 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고 할까요, 일상에 찌든 생활인이라는 상투적 외피를 벗은 후에도 참 자기라 할 수 있는 옹골진 내면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을 당신은 가졌냐고, 아니 앞으로 가질 수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돌아가신 친구의 아버지는 기업의 중역으로 계시면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직장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조언과 지혜를 담은 책 한 권을 남겼습니다. 50세가 채 안 돼서 돌아가신 분이니 지금 돌이켜보면 일에 파묻혀 지내야 했었을 중년에 어떻게 시간을 내어 틈틈이 글을 쓸 수 있었는지 그분의 치열한 자기관리와 단촐, 정결했을 내면 세계가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지인 중에는 재즈 음악 분야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음악가이자 독서광으로 ‘직장인 아무개’ 말고도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꾸준히 가꾸어 온 분도 있습니다.

회사의 중간 간부로 일하는 40대 호주 남성 하나는 아마추어 도자기 공예가로서 10년 남짓 제작한 작품이 2백여 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경우는 직장 생활과 궤를 같이하는 평생 취미를 개발한 셈인데, 퇴근 후 하루 두세 시간을 꾸준히 투자한 결과였다고 합니다.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뒤늦게 화가의 꿈을 이룬 후 호주 화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분, 배관업을 하며 밤마다 시를 써서 최근에 두 번째 시집을 낸 친구의 남편, 은퇴 후 문인으로 인생 후반을 경작하는 이모작 인생, 치과 의사이면서 글쓰기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제 조카 등 손꼽아 보니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잠 안 자고 글을 쓴다 한들 무에 대수랴, 젊지도 않은 나이에 공연히 몸만 축나지 하는 생각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더욱이나 실감하게 되는 요즘, 이대로 상황에 마냥 끌려다닐 수만은 없다는 결연한 다짐을 해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자,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니 ‘눈물 젖은 글’을 쓰는 자, 깊은 정신적 성숙과 영혼의 섬세한 울림에 다다르길 소망하면서…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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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작게 줄이고 귀를 크게 열자

금 장 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조선시대를 이끌어갔던 지성인으로서 선비의 이념은 ‘의리’(義理)였다. ‘의리’는 불의에 타협하거나 굽히지 않는 엄중한 비판의식에 바탕을 두는 것이니, 우리시대의 용어로는 ‘정의’라 할 수 있다. 옳은 것을 취하고 그른 것을 버리는 확고한 가치판단을 지켜간다면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양심과 상식이 있으니 건전한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옳은 것을 보면 옳다하고 그른 것을 보면 그르다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비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지자 서로 자신이 옳고 상대편이 그르다는 주장이 맞서게 되어 시비의 판별이 어지러워지게 되는데서 발생하였다. 자신은 진리요 상대방은 허위이며, 자신은 ‘군자’요 상대방은 ‘소인’이라고 맞붙어 싸우게 되면 누가 그 옳고 그름을 판단해준단 말인가. 어쩌면 다수의 대중이 판단해준다는 ‘공론’(公論)이나 ‘여론’을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중들이 이쪽 편에 서거나 저쪽 편에 서서 갈라지면, ‘공론’이라는 것도 믿을게 못된다. 어느 쪽 목소리가 큰지, 어느 쪽 기세가 거센지에 따라 이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고 저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하니, ‘의리’라는 것도 구호에 불과하고 ‘공론’도 세력에 불과하다. 요즈음 거리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떼 지어 다니거나 촛불을 들고 떼 지어 모여들어 모두가 자기주장만 옳다고 외치며 기세를 올리고 있는 광경과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붕당은 달라진게 없는 듯

선비들 사이에 신념을 달리하면서 무리를 지어 붕당(朋黨)이 이루어지고, 서로 대립하여 당쟁(黨爭)을 한 번 시작하자, 잠깐 사이에 온 나라가 둘로 갈라지고 넷으로 갈라지며 끝없이 분열과 갈등을 계속하였다. 당파마다 제각기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정당한 명분을 내걸고 있으니, 상대방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백성들은 도륙을 당하는 참혹한 현실에서도 ‘죽일 놈’은 왜적에 앞서 먼저 상대편 당파를 지목하여 목청을 높였다.

국경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했던 선조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지었던 시에서,

“의주땅 물가에서 달을 보며 통곡하고/ 압록강 바람에도 가슴을 앓는구나/ 조정 신하들이여, 오늘의 처지를 겪고서도/ 또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려드느냐”라고 읊었다. 인조임금은 이 시를 읊조리며, “그렇다. 병란(兵亂)이야 언젠가 멎을 때가 있겠지만, 붕당은 멎을 기약이 없으니, 그 피해가 수재나 병란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라 탄식하였다 한다. 자신의 당파만이 진실하고 정당하고 선하다는 확신으로 당파적 신념에 목숨을 걸고 있는 인물들에게는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당론을 지키는 것이 더 소중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당쟁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도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율곡은 서로 비난만 일삼는 동인과 서인의 양쪽을 화합시키기 위해 양쪽 모두 옳은 점도 있고 양쪽 모두 그른 점도 있다고 지적하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제시하여, 당쟁의 양쪽 주장을 조정하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양쪽 편으로부터 동시에 의심과 비난만 받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왜 당쟁은 갈수록 깊어지기만 하고 해소될 수 없었던 것일까? 그 원인을 돌아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지만 그 속의 실상은 세력과 이권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감추고 있다. 말하자면 밥그릇을 제가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예법과 의리를 내세워 상대방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자기 신앙만 진리라고 주장하거나 자기 견해만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독선적 개인과 집단은 모두 당파적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당파적 심리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한다는 상극(相克)의 논리요 함께 어울려 살자는 상생(相生)의 논리가 아니다.

문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떠오른다

현대인은 물질적 욕심만 가득하고 정신적 사유는 빈곤하다 하여 배는 크고 머리는 작은 기형아로 그려내기도 한다. 당파적 대립에 빠진 인간들은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대방의 견해는 이해하려들지 않으니 입만 크고 귀는 없는 기형아로 그려낼 만 하다. 그렇다면 당쟁을 해소하는 길은 자기주장의 목청을 낮추어 입을 작게 줄이고 남의 주장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귀를 뚫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 말을 잘하는 달변(達辯)을 미덕으로 높일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 이순(耳順)을 진정한 미덕으로 높이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을 시켜야 하고, 사회적으로 확신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일 것 같다. 입장을 바꾸어 남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너무 부족하여 당쟁의 혹심한 폐단을 일으켰지만, 오늘의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일방적 주장의 투쟁구호만 요란하고 상호이해의 대화는 결핍되어 사회적 통합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기주장의 목청을 낮추고 상대방을 향해 귀를 크게 열기만 한다면, 정당의 극단적 대결이나 노사의 갈등도 풀리고, 남북의 대립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니전투구(泥田鬪狗)의 진흙탕에서 벗어나 툭터지고 평탄한 대로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입을 작게 줄이고 귀를 크게 여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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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의 군자와 미인들

국내외를 막론하고 화장실에서 각종 사건이 끊이지 않습니다. 최근만 해도 몇 개의 언론보도가 눈에 띕니다. 일본의 어느 경찰관이 여자 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해 사진을 찍다가 들통났는가 하면, 영국의 어느 기업인 부부는 화장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다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서로 먼저 볼일을 보겠다며 다투다가 급기야 총탄이 발사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요지경 같은 화장실 사건들을 보면서 언젠가 외국 언론인들과 대만 타오위엔(桃園) 일대의 문화시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려고 어느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먼저 화장실 사용에 대한 설명부터 꺼냈습니다. 그렇다고 얘기 자체가 그렇게 복잡했던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남자는 왼쪽 칸을, 여자는 오른쪽 칸을 사용하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각국에서 신문,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설마 화장실의 남자, 여자 칸도 구분하지 못할까 봐 저렇게 극구 강조하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곳 화장실 문에는 남녀 칸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 ♀ 등의 표시나 치마, 바지 등의 식별 그림이 붙어 있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간단히 M(남자), W(여자)라고 쓰기만 해도 됐을 터인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남자 칸에는 ‘군자(君子)’라고, 여자 칸에는 ‘미인(美人)’이라고 한자로 씌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자를 모르는 서양의 각국 기자들이 자칫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가이드가 거듭 반복해서 얘기했던 것임을 화장실을 직접 이용해 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격식을 갖춘 식당이어서 나름대로 동양적인 멋을 부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날의 저녁식사도 운치가 있었지만, 그보다는 화장실에 대한 기억이 더 깊이 남아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겠지요.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쑥스러운 생리현상을 처리해야 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이용자들의 공중도덕과 질서의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곳이 화장실입니다. 실제로 그 사람이 군자인지, 또는 미녀인지를 구분하게 만드는 곳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더욱 들게 됩니다. 지하철 역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공원 등 어느 곳에서나 사정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청소를 하면서 흘린 물이 바닥에 그대로 고여 있는가 하면 화장지가 여기저기 버려져 있기도 합니다. 변기도 대체로 지저분하기 마련입니다. 변기에 앉을 때마다 화장지로 한번씩 닦아내고 이용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나마 길거리를 지나다가 갑자기 볼일이 생겼는데도 화장실을 찾을 수 없어 조마조마했던 기억을 한두 번씩은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화장실이 있을 만한 건물을 찾아 황급히 들어가면 대개는 자물쇠로 채워 놓았기 십상입니다. 이런 사정이니만큼 화장실이 지저분하니 어쩌니 하는 자체가 과분한 투정이라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명품 도시’를 지향한다는 서울 도심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 공중화장실이 많이 늘어난 데다 전반적으로 청결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불쾌한 냄새가 진동하고 벽면이 온통 야릇한 낙서로 지저분하기만 하던 옛 모습과는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특히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새로 짓는 공중화장실은 외양과 내부 디자인에 있어서도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외벽에 천연 목재를 사용한다든가 자연 채광으로 밝은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공중화장실에 어린이용 변기와 세면대가 설치되고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전용 공간을 두도록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발전입니다. 정책적인 배려의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심지어 아기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교환대도 설치되도록 규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무실 빌딩마다 남녀 비율에 맞추어 여자 화장실을 늘리는 개조작업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데 비해 일반인들의 화장실 사용 습관은 거의 나아지지가 않았습니다. 화장실 시설은 월등히 좋아졌어도 공중의식이 받쳐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의적으로 여겨지는 고장으로 변기가 틀어막혀 배변이 씻겨 내려가지 않거나 금연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도 담배꽁초가 바닥에 버려져 있기도 합니다. 요즘은 엉뚱하게도 몰카 걱정까지 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어차피 아무리 청결하게 유지한다고 해도 냄새가 나고 지저분해지기 쉬운 곳이 화장실입니다. 더구나 내 집도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같이 사용하는 공중화장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결국 이용자들 스스로 문화인이라는 자부심으로 깨끗이 사용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것이 서로가 신사이며, 숙녀임을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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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은


날고 기는 놈이 많다지만
계속 가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노력해서 배우고 아는 것도 좋지만
그 으뜸은 말없이 즐기는 사람이다.

인생 일흔 줄에 서 있어도
노인으로만 있어서는 안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라고
헛기침만 하고 뒷짐지고 다녀선 안 된다.

나름대로 일이 있어야하고
경륜과 원숙을 펼칠 방법이 있어야 한다.

평소의 실력과 능력을 살려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
배우고 갈고 닦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새삼 이 나이에..... 하는 망설임은 금물,
하지 않음보다 늦게라도 시작함이 옳다.

아무리 달관하고 초월했다 해도
삶과 능력을 즐길 기회가 없으면
쓸모가 없는 것 아닌가.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知之者不如好之者)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好之者不如樂之者) - 공자.

많은 것을 알고 좋아하지만
즐겨하지 않는다면 그 무슨 소용이람.

참 삶 (Well-Being)처럼
풍요롭게 건강하고 즐거우면 된다고 한다.

인품과 교양도 쌓아 정신적인 완숙기에 들었다면
노년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살아야 하지 않는가.

노년의 즐거움은 단순 순박해야 하고
빈듯이 소탈하고, 너그럽고 정다워야 한다.

구름같은 인생, 그 순간순간을 즐기되
탐욕적인 타락한 쾌락은 멀리해야 한다.

자연을 벗하며 겸손을 배우고
따뜻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볼 때

정다운 사랑의 문이 열리고
우리들의 마지막 황혼도 아름다울 것이다.

樂而不流 (즐거워도 무절제 않고)
哀而不悲 (슬퍼해도 아파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잃어가는 상실의 시대
보다 단순하게. 아이들처럼 함께 웃고 살자.

가장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은
남은 인생 즐겁게 웃으며 사는 사람이다.


Posted by 평강이와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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